꼬리말이 전혀 오르질 않네요. 흐유~ 힘들다. 지금까지 꼭 네 번 자판을 두드리다가 아예 형식을 바꿔 답글로 올립니다(예전에도 여러 번 그랬음. 수정 또한 여러 번 건의했었고...).
두 교우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인 제 소감은 요한 회장의 기도문에 따른 댓글과 그후 한번 더 올린 꼬리말로 갈음하렵니다(두번 읽으실 분도 안 계시겠지만^^ㅎ).
먼저 뻔한 얘기이지만 강조해야 할 점. 무조건적인 원칙은 인명 먼저, 따지는 거 나중에입니다. 그런 뜻에서 정부나 관련기관, 시민단체들도 나름대로 물밑노력이 한창인 줄 압니다. 특히 종교계의 경우, 얼핏 보면 침묵하고 있는 듯 해도 똑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겝니다. 사태가 그만큼 민감하고 위중하므로 침묵도 때론 전술적으로 필요할 테고요. 또한 놓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현실에는 정치공학적 힘이 얽혀듭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정부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애초부터 독자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돼 있다고 보입니다. 이 걸 말로는 점잖게 국제공조라 하지만 미국의 움직임을 냉엄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같은 연장선에서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낼 땐 무덤덤한 가슴으로 방관하거나, 신앙인다운 일말의 통회 한번 없었다가, 사후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라에 가서 펼치는 봉사(선교)활동을 숭고하게만 봐야 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 알량한 국익과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겝니다. 아니면 선과 악의 구도 아래 세계를 보는 건가요? 그래서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신앙인에게도 에누리 없이 절실하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탈맥락적이라 할가요, 개인적이고 종파적인 해석이 우세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나중에 따져야 할 문제입니다. 다름아니라 철군문제이죠.
그 다음. 원문의 기본 틀에 공감합니다. 헌데 기본 용어에서 초점이 어긋나 보입니다.
그노시스gnosis란 그리스 어는 우리 말로 靈智로 옮기지요. 말 그대로 옮긴다면 그노시스는 '지식'이나 '인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장 큰 장해물은 무지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혼동이 일어나는 건 영지주의란 말의 다의성 때문이겠지요. 이를테면 신과 나의 합일을 주장하는 신비적 요소로 인해 지식도 그냥 껄렁한 지식이 아닌 영성적 지식을 강조하게 되니까요. 이 점에 비춰 보더라도 본격적인 영지주의 경전이라 하는 유다 복음서나 요한복음(계시록이 아님)에도 그러한 기술이 차고 넘칩니다. 여기서 결국 영지주의는 주지주의의 대립항이라기 보단 되레 친화적 관계가 돼버립니다. 역사적으로도 영지주의자들이 정통 교단에서 밀려난 이유도 그들의 이러한 이성적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지주의를 훤히 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아는 한도에서 성실히 말하고 싶을 뿐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영지주의를 대안적 문맥에서 보고 싶습니다. 이유라면 간단합니다. 특히 미국에서 지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부시 대통령도 이쪽에 들어감)를 생각할 때 더욱 갖게 되는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한기총이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배후, 그 공격적 성향에서도 미국의 짙은 그림자를 감지할 때가 많습니다. 살펴 본다면 영성과 이성은 신앙인에게 두 개의 큰 기둥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도 중도라 할까 극단을 벗어난 인식의 역동성이 열쇠이겠는데 우리 성공회의 큰 기둥via media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봉사단원들은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요.
거듭 말하지만 일부 용어를 빌미삼을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원문의 기본 틀에 깊이 공감하니까요.
건필하십시오.
탈레반은 즉각 선량한 한국인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라. 관용과 자비의 이슬람 정신을 지키라. 그대들이 먼저 들어야 할 것은 민중들의 신음소리이리. 칼과 창을 녹여서 쟁기와 낫을 벼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