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토) 저녁. 몽촌토성이 가까운 한미타워 “어양”에서 (사)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가 연 송년회 행사가 있었다. 지원본부는 북녘 어린이 돕기 운동으로 출발한 순수 민간단체로서 올해로 설립한지 11주년을 맞이한다. 이번 모임이 내건 이름은 <만경대 어린이 종합병원> 건립을 위한 후원의 밤이다. 의사, 약사, 치과의, 한의사들이 주축이 된 지원본부가 11년 동안 펼쳐왔던 대북 주요 활동은 의료품 지원이었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작아 보이지만 오히려 큰 시민적 덕성과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휴머니즘의 따뜻한 결기야말로 이 모임을 지탱해온 힘이었을 것이다.
실내로 들어서니 “건강하여라, 북녘 어린이들아!”라고 쓴 파랗고 커다란 글자가 전면에 걸려 있다. 자리에 앉기 전 잠시 서성거리게 된다. 무념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 무엇 때문이다. 헐벗고 여린 핏줄을 향한 즉자적인 비원이 시리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선 순백의 정감어린 기원에 걱정스러워진다. 짧은 늦가을의 끝자락을 밀쳐내고 세밑이 다가온다. 일 년 삼백 예순 닷새 날이 빠져나가는 세밑은 이래저래 허허롭다. 미국을 진원지로 한 경제 불황은 전 지구적이다. 전반적인 남북 화해교류는 피어보기도 전에 일찍이 쇠락의 내리막이다. 금강산에선 관광객이 북한 병사의 총탄에 쓰러지고 이어 개성공단마저 문을 닫아버릴 판세다. 게다가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유연해질 가능성은 적어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앞좌석에 모여 앉은 원로들의 성긴 흰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더욱 눈에 들어온다. 장강의 뒷발길이 부지런히 앞 물결을 밀어낸다. 흐르는 물결 속에 세월이 간다. 허나 흐르는 건 세월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일 뿐. 다시 그러나, 흘러간다고 하여 대양의 뒤란으로 사라지는 건 아니리라. 사람들의 노역도 그러한 흐름의 도저함을 닮았다. 그리하여 알베르 까뮈는 인간을 시지프스 신화에 빗대기도 했다. 본부를 이끄는 이사진은 모두 지식인들이다. 대개 ‘바람 앞에 풀잎처럼 눕는’ 이 세태 속에서 그들은 어쩌면 무모한 낙관주의자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임종철 이사장과 김유호 총무이사의 말을 옮겨 보자.
“흔히 돕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처럼 건방진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눔은 어떤가? 이 말도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달리 보면 우리가 진 빚이다. 북한의 비민주 체제와 인권문제에 왜 침묵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한다면 돕기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공감한다. 하지만 어렵고 예민한 문제다. 어쨌든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북한의 얼굴은 결국 우리 남한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냉엄한 레알폴리티크 세상에서 우리의 선의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망할 땐 확실히 망하는 게 순리라고 본다면? 그쪽 꼬마들이 굶주린다면 내버려둬야 한다는 사람들마저 있다. 제대로 키워놓으면 결국 우리 아이들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은 정치 밖에 그 너머에 더 너른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그 길을 향해 우리는 가고 싶다. 우리 뿐 아니라 여러 시민단체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 큰 힘이 된다.”
지원본부는 2008년 한 해 동안 평양 만경대구역 칠골동이란 곳에 [만경대 어린이 종합병원] 신축공사를 진행했다. 터잡기와 골조 따위 건물공사는 북에서 맡고 남녘에선 내부를 채우는, 즉 주요 시설과 의료기기들을 담당한다. 당연히 십억 원 단위의 돈이 들어가는 큰 사업이다. “한 쪽은 오랜 동안 러시아의 영향을 받고 우린 미국 쪽이라 의학용어도 서로 맞지 않는다. 그저 통하는 건 말과 마음뿐이다. 하지만 기기를 다루는 책자를 건네주고 다음에 만났더니 책자를 줄줄 외우고 있더라.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에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제는 돈 이외에도 많다. 민간 교류가 전면 끊기지는 않더라도 정치상황이 옥죌 게 뻔하다. 그런가 하면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센 나라’가 북한이라고. 구호물자가 민중에게 배급되는 과정의 불투명함도 당장 문제가 된다. 따라서 지금은 외국의 숱한 자선단체들마저 선뜻 지원을 꺼린다고 한다. 북한 말고도 지구상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가 “쎄고 쎘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린 창문 밖으로 달이 걸려 있다.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들이 얼마쯤 공허하게 들린다. 그런 가운데 이 한 해를 보내는 술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다. 나는 이 모임을, 그 건강한 힘을 믿는다. 민주 시민사회의 역량에 대한 바람이 크기 때문이다. 현대국가는 힘이 세다. 그러나 본디 부자연스럽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는 자연에 가깝다. 밥 먹고 웃고 울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사회다. 그런 뜻에서 사회는 국가를 이루는 하위 단위가 아니라 이끌고 가는 공동체적 모형이 된다. 이럴 때 시민은 더 이상 국가의 거센 바람에 몸을 눕히는 풀잎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외연을 넓혀온 지원본부의 노력에 주목한다. 협소한 민족적 틀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에서다. 유니세프, 국경을 넘은 의사회라든지 버마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감 등이 바로 그러한 싹이 아닐까.
사진: <경향닷컴> 정지윤 기자의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