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향닷컴] 2008. 12. 2일자 <문화속으로>-만약 자동차가 사라져야 한다면
2. 글쓴이: 한윤정 기자 / 문화 1부 차장.
“전형적인 미국사람이라면 일 년에 1500시간(하루 4시간) 이상을 차에 할애한다. 여기에는 차를 운전하거나 기다리는 시간, 자동차값을 지불하고 휘발유·타이어·통행료·보험·범칙금·세금…등을 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이 미국인은 (일 년에) 1만킬로미터를 달리는데 1500시간이 필요하다. 6킬로미터에 한 시간이 드는 셈이다. 운송산업이 전무한 나라의 사람들이 걸어 다닐 때 걸음 속도가 정확히 이와 같은데, 게다가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아스팔트 포장한 도로가 아니더라도 다 갈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는다.”
이 글은 이반 일리히의 <에너지와 형평>에 실린 것이고, 나는 이 글을 국내에 막 번역된 앙드레 고르의 책 <에콜로지카>에서 발견했다. 고르는 일자리 나누기를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정치학자이다. 그가 자동차를 바라보는 관점은 “누구나 갖고 있어도 사용가치가 그대로 유지되는 진공청소기나 라디오와 달리, 남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의 별장처럼 대중이 갖지 못해야만 이익과 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도로가 막히면 전혀 제 값을 못하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카지노자본주의 붕괴에 이어 산업자본주의의 정점인 자동차산업이 사면초가에 처했다는 소식이다.
포드·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자동차 빅3 체제가 무너질 판이고, 국내 완성차 5개사도 4분의 1가량 감산체제에 들어갔다. 지난달에는 경차(기아 ‘모닝)가 9년10개월 만에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2만여개의 부품으로 완성되는 제품이자, 전·후방 연관효과가 엄청난 자동차산업의 쇠퇴는 ‘암울한 뉴스’다. 자동차 공장이 멈춰선다는 게 흡사 우리 몸의 피돌기가 느려진 것처럼 짓누르는 기분을 준다. 그런데 다시 고르로 돌아가면 “자동차가 도시를 죽이고 다시 자동차를 죽이는 결과”는 이미 예측된 것이다. 화석연료는 점점 비싸지고 도로는 무한정 넓힐 수 없다. 전국민 승용차시대의 개막에 이어 배기량 높이기 경쟁이 붙었던 국내의 자동차 수요 역시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산업의 쇠퇴는 일시적이거나 암울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해결책은 생각과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불황의 그림자가 길고 짙다. 위기의 효과는 ‘지금부터 진짜’라는 공포 바이러스가 돌고 있다. 10년전 IMF 관리체제를 겪었기 때문에 공포는 더욱 실감난다. 가장은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가족은 다시 흩어질 것이다.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거리에 줄을 서는 실업자의 행렬이 다시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IMF 시대의 상징이었던 ‘몰락한 아버지’의 서사가 재연되고, 저렴하면서 충실한 소일거리인 소설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10년전 우리는 정신없이 당했던 외환위기를 성찰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는 대신,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정글사회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다시 재연된다면 모든 악이 정당화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효율과 인력감축을 당연시하고 그런 체제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사회불만세력으로 매도된다. ‘유연생산체제’라는 미명 아래 사회는 더욱 경직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경제살리기에 앞서 발상의 전환이다.
누군가가 IMF를 추억하면서 ‘아버지’를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다시 아버지를 위해 울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화의 아버지들은 이미 10년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신 이번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자본이고 물신이다. 지난 10년간 고착된 물질만능의 구조, 즉 부자의 자식들만 주류이고, 대학에서는 좌파지식인이 사라지고, 정치는 경제에 종속되는 구조야말로 이번 위기를 통해 극복돼야 할 대상이다.
물신 극복할 ‘발상의 전환’ 필요
자동차를 사지 못한다면, 기왕에 산 차조차 세워두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전철, 버스, 택시, 기차 그리고 필요할 때 길에 세워진 아무 차나 끌고 가서 종착지에 놓고 가는 신종렌터카도 있다. 그래도 너무 경직된 건 비현실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동차가 우리에게 주었던 향락을 누릴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스트레스 받을 때 음악 크게 틀어놓고 달리기, 몸이 불편한 부모님 꽃구경 시켜드리기, 자동차에서 영화 보면서 연인과 데이트하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