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라고 잘 알려진 오늘 복음 성경의 말씀은 세리 그리고 죄인들을 환영하고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불만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리와 죄인들은 지탄받아 마땅한, 그래서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비유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 아들은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미리 청합니다. 이것은 당시 관습에 심히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몫을 받자마자 전부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난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그가 집안과 아버지의 간섭, 아들의 책무 등을 떠나 제 마음대로 자유로이 살고 싶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재산을 탕진한 그는 결국 알거지가 되고 맙니다. 때마침 그 고장이 심한 흉년까지 들어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고, 결국 그는 어떤 사람 집의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돼지를 치고, 돼지밥으로 허기를 달래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비참한 상황에 처합니다. 자유를 꿈꾸며 내 삶에서 아버지를 밀어냈지만 밥 한 끼조차 마음대로 해결 할 수 없는 부자유를 경험합니다.
반면 큰 아들은 묵묵히 아버지의 곁에서 아들의 소임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런 와중에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의 소식을 접합니다. 더욱이 아버지의 질타를 받고 쫓겨나야 마땅할 동생을 벌주기는커녕 잔치까지 열어준다는 소식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억울함을 항의합니다. 그는 책임감 없고 방탕하며, 무례한 동생이 떠났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마음에서 밀어냈던 것입니다. 동생의 안부와 그간의 생활에는 아무런 관심 없이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케 합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안정적인 삶과 아버지의 인정을 바랬지만 참을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는 한결 같습니다. 작은 아들이 떠나고자 할 때 재산을 허락해주고, 돌아올 때에도 그를 안아줍니다. 큰 아들과 함께 살 때에도, 분노에 치달을 때에도 그를 안아줍니다. 오히려 잔치를 열어 자신은 물론 모두가 서로를 안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아버지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든, 방탕한 아들이든, 나에게 화를 내는 아들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제자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내 마음에서 밀어냅니다. 내 행복을 위해, 내 자유를 위해, 내 이익을 위해, 혹은 정의를 위해, 신앙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등 수많은 이유로 밀어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밀어냄으로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다가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안아주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받아들임 가운데 주님과 우리의 뜻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