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화해, 그리고 용서
오늘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장소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가리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죄’는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죄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나 행동을 죄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즉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당시 가장 유명한 예언자였습니다. 에세네파와 맥을 같이 했던 세례자 요한은 도덕적 회심과 금욕을 중시했습니다. 칼 같은 회개와 정의가 그에게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도덕적 회심을 넘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향한 회심을 선포하십니다. 이후 보이셨던 가난한 이, 세리,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고, 율법을 어기는 예수님은 금욕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생각과 방법이 달랐던 예수님이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베푸는 세례운동에 찾아와 그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그 행동은 세례자 요한에게 큰 감동과 위로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날카로운 회개를 요청하지 않았고, 자신과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찾아오시어 자신의 실천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이전에 행했던 나의 방법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신뢰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온전히 이해해 주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세례자 요한은‘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어리숙한 사촌동생인 예수가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부르시고, 찾아오시어 함께 하시며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그 과정에 회개와 용서는 앞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이해하고, 그분과의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회개와 용서는 그 과정의 끝에 자연스럽게 찾아온 결과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시듯 회개와 용서는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거나 용서를 비는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이 증거해주시는 인정과 신뢰를 경험한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바로 ‘회개’와 ‘용서’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계십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주님의 곁에서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당신이 보여주신 방법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그렇게 먼저 이해하며 화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의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