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봄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언제 한 아이가 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게 되나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아이의 태도를 지켜보면 됩니다. 아이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부풉니다.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고 말하기는 민망하고, 부모님께서 아끼고 아끼다 전해주시는 선물 때문이지요. 2주, 혹은 1주 전에 부모님은 물으십니다. “어떤 선물이 좋아? 착하게 말 잘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실 수도 있어.” 강아지에서부터 게임기, 만화책 등 온갖 선물 목록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는 더 이상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을 내놓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선물의 이름들이 사라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 특히 부모님이 애쓰며 살아가시는 그 모습, 세상의 모든 것일 것만 같았던 그분의 나약한 어깨와 왜소한 등을 알아보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우리의 기다림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내 희망과 요구, 기대가 멈추고 나를 위해 다가오시는 하느님, 그리고 언제나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성장했음을 느낍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기다림’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조금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 욕심이 나자신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고, 살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저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고, 빛을 비추시고, 거름을 주시는 그 거룩한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기다림의 계절에, 역설적이게도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기대가, 우리의 소원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자주, “기대한다”는 말과 뒤섞여서, 무엇이 본래 뜻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혼동되고는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나의 뜻이, 나의 기대가 성취되기를 향하지 않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오히려 나의 뜻이 꺾이고, 하느님의 뜻이 나를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매우 수동적인, 수용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기대를 꺾어버린 것처럼, 우리의 기대는 꺾여야 합니다. 그 후에 새로운 차원의 기다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2독서, 야고보의 편지에 담긴 비유는 큰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는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