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온 삶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하느님께 바쳐지셨고, 삶의 모든 여정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삶의 모습을 따라 ‘봉헌’이라는 신앙의 태도를 만들었고, 성령께서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봉헌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들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봉헌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아기예수가 온전히 바쳐진 것처럼 우리 자신이 참된 예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온전히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바친다는 것, 우리 자신이 예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면 내 일상은 어떻게 하나요? 가정도 꾸리고 자녀들도 돌보아야지요.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고, 하루하루가 바쁘고 내 앞에 떨어진 일 해결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당장 내 삶을 살아야지요. 어쩌면 그 괴리감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드시기도 할 겁니다.
특별히 저는 지난 주간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삶의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면서 어쩌면 봉헌된 삶이란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님. 누군지 아시나요?
일본군 위안부로 만 14세에 끌려가 끔찍한 일을 겪고, 해방 후 47년에 한국에 돌아왔지만 조용히 고향에서 살아가시다가 92년 자신의 피해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이후 할머니는 전 세계를 돌며 전쟁당시 일제의 만행을 알려오셨지요. 그런 할머니께서 지병으로 지난 28일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이 전쟁 성폭력 피해자임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며 눈물로 호소하셨던 할머니.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세우시고, 전 세계 전쟁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나비기금’을 조성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전 재산 5천만원을 재일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차별 속에 사는 재일 조선인 학생들이 배움의 희망을 놓지 않도록 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겁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는 이와같은 일이 역사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온 생애를 봉헌한 김복동 할머님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고 헌신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이 성찬례 가운데 우리의 삶의 중심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으로 봉헌된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지 다시금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