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을 읽는 많은 분들은 베짜타 연못의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대체로 두가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능력은 참 대단하시다. 38년 동안 고통받던 사람을 고치셨다”고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의미 있는 이야기지만, 진짜 병자가 치유�겠어? 예수님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만든 이야기겠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두 생각, 진짜 치유가 일어났다는 생각과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생각 모두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유가 일어난 맥락, ‘치유 받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경쟁자, 적이 되어버린 현실’이라는 맥락을 놓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단순히 신비한 일이나, 깊은 의미를 담아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기적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가감없이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은 노력을 통해 승리하는 자의 것이지”, “부족한 사람들은 도태되는 게 당연해”, “사랑이란 말은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사실 이 말은 치열하고 지저분한 현실을 가리기 위한 말일 뿐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베짜타 연못 근처에 누워있는 병자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치유 받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옆 사람이 나보다 더 먼저 치유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옆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자비를 얻으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두려움, 옆 사람보다 내가 먼저, 더 많이 은총을 누리려는 욕심에 자주 휘둘리는, 몸은 건강하고 멀쩡하지만 사실 깊은 병이 든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진정 “낫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일어나 침낭을 들고 걸어가십시오”.
당연하다 여겼던 삶을 돌이켜, 다른 길을 가십시오.
미움과 다툼, 경쟁이 세상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이 베짜타 연못에서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이 명하시는 사랑의 땅으로 걸어가십시오.
진정한 기적은 그런 것입니다. 병이 낫고, 눈이 떠지고, 말라붙었던 손이 펴지는 것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부활로써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따라, 우리 또한 이 순전한 가르침을 따라,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2 천년 간 묵묵히 이 길을 걸어온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