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리는 부활의 삶>
오늘 복음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자녀 없이 남편을 잃은 여인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라는 모세의 율법을 거론합니다. 이어서 하는 질문이 고약합니다. 자녀 없이 여섯 명의 남편을 잃어서 일곱 형제와 모든 결혼한 여자는 죽음 이후 부활했을 때 누구의 아내인지를 묻습니다.
물론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이 질문은 부활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입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그 가문의 형제와 재혼하는 율법을 다시 살펴봅니다. 당시 여성 혼자서는 자립할 수 없는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누구도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 사람의 질문에서, 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누구나 누려야 할 하느님 은총의 삶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이 질문이 더욱 고약한 것은 주님이 베푸시는 부활을 이상하게 해석하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이 단지 육신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어떤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현실과 같은 논리의 세계로 상정하였습니다. 부활한 이후에도 여성은 여전히 남자와 그 집안이 책임져야 하는 존재, 가문의 재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갇혀있는 생각을 깨뜨립니다. 부활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부활한 생명이라 선포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죄된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를 책임지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무한한 은총의 삶, 즉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부활은 우리 육신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존재이든 그를 온전히 책임지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2데살 2:16)
부활의 삶은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며 지금 누려야 할 위로와 희망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