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으로 가득한 추수감사주일
얼마 전 <미니멀리즘>이라는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소유할수록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미국의 이상에 맞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품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영상 속에서 미국 사회가 시민들에게 만든 환상에 대해 비판하는 한 정치인의 발언은 통렬합니다. “우리는 이상을 향해 달려오던 시대를 뒤로하고 자신의 이기심과 소비만을 지향하며 사는 사회에 접어들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이 더 이상 하는 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물건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것으로는 의미를 갈구하는 우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죠. 사람들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전 여러분께 충고하는 게 아닙니다. 전 여러분께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복음서 속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다 예비해 주신다”는 위로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공중의 새”와 “들꽃”을 예로 드시는 대목으로 접어들면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의 요지가 위로와 감사, 평안함을 누리라는 기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라는 33절의 말씀을 주목하면, 이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처지를 위로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께로 돌리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교회 공동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필수품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먹을 것과 거주할 곳, 입을 것에다 온 마음을 쏟기 시작한다면, 삶의 목표가 삶의 안위와 평안만을 가리킨다면 그 마음은 ‘탐욕’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탐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나라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물질들, 풍성한 은총은 우리의 안위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베풀어진 것들입니다.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거둔 모든 것, 관계 맺어 온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서 속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평안, 우리의 감사와 기쁨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느 곳을 향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