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치유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1독서 이사야서가 예언한 일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 그들이 당신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한 일들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도래를 통해서 시작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희망은 먼 미래가 아닌 나자렛의 이 인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본문이지요.
특히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우리 믿음이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계십니까?’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20세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지적했듯이 자신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 “값싼 은혜”를 받고자 애쓰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듯이 “값비싼,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있음을 기억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구원이 “값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말을 “헐값”의 무언가를 받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우리가 받은 선물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살피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산다는 말은, 누군가를 속여 곤란하게 한다는 말과는 정반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사야서가 예언했던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라는 말을 실현하는 사람들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휘황찬란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 가치와 깊이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소란스러움과 화려함은 오히려 우리의 왜소함과 초라함을 가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번듯한 집, 멋진 옷, 풍성한 음식에 대한 한없는 추구는 우리 내면의 빈곤함을 채우려는 어리숙한 시도에 불과하지요. 세상은 여전히 자신의 본래 사명을 발견해야 하는 과제 앞에서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세상에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여전히 예수님의 사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따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이라는 값비싸고 근원적인 선물을 전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 복음서는 우리를 이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응답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