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지혜로운 청지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어 결국 해임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소작인들의 소작료 일부를 가로채 이득을 얻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왔을 테니, 몸으로 땅을 일구기에는 너무 약하고 걸인들처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셌을 것입니다. 그가 유일하게 가진 권한, 곧 사라질 그의 권한은 소작인들에게서 받을 소작료를 조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지고 있던 빚 일부를 탕감해줌으로써 앞으로 자신이 일터에서 쫓겨난 뒤의 일을 대비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난해하고 이상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청지기의 행동을 알게 된 주인이 청지기를 나무라기는커녕 그의 행동을 “영악하다(지혜롭다)”고 칭찬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의 ‘돈을 빌려줬을 때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청지기의 소행을 법정에 고소하기라도 한다면, 거꾸로 위기에 처하는 것은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학자들은 청지기가 한 일이 바로 이 불법적인 이자를 탕감해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인인 청지기에게 허를 찔렸기에 고소를 하거나 처벌을 내리기보다 조용히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겁니다. 청지는 유유하게 소작인들을 향해 나아갔겠지요.
청지기의 영악한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이 비유의 요점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세상의 자녀들은 현세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이웃과 관계 맺기를 미루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영리하게 이웃과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재물은 다른 이를 먹이고 살피는 데 사용될 때 가장 고귀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안위와 평화만을 위해 재물을 움켜쥐려 할 때 재물은 그것 자체가 하느님이 되어 우리를 속박할지도 모릅니다. 재물을 맘몬, 또 하나의 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둘째,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돈과 관련하여 간혹 겪는 곤란함을 살펴봐야 합니다. 믿음과 기도같이 순수하고 중요한 영적 문제들이 영원한 생명에 연관되어 있음은 너무도 잘 알지만, 돈처럼 ‘때묻고, 불의한’ 것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신앙인들이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다는 점을 고심해봐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에게 “때묻고”, 신앙적으로 “하찮아”보이는 것들도 하느님께 다가가는 여정에서 소중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이자 수단입니다.
여러분은 불의한, 아니 지혜로운 청지기로 이 세상을 사십니까? 아니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또 다른 신을 섬기며 사십니까? 우리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는 한주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