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덧입어"
예수님은 본인을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세 사람을 만납니다.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며 물리시고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두라”며 재촉하십니다. 또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일갈하십니다.
이 본문을 읽노라면, 질문이 생깁니다. 의지를 불태워도 안 되고,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안 되고, 심지어 작별인사마저 안된다니요. 대체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예수를 닮는 일”, “예수와 같이 사는 일”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를 찬미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노력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조언을 얻을 한 인물이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이며 가르멜 수도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름이 외양이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근본적인 것, 그의 마음(동기)에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인은 이를 “그리스도를 덧입는다”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그는 열정과 행복, 선에 대한 갈망, 하느님 현존의 느낌과 같이 신앙하기 시작했을 때 경험한 기쁨들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열정은 사라지고, 실망과 갈등,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메말라 버린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거둬주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러나 당신의 뜻이라면” 그 길을 걷겠다고 말씀하시듯 하느님의 뜻에 다시 내 삶의 방향을 맞춰 여정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