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아주 친했던 세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천주교신부, 또 한 사람은 목사,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자 마자 신부와 교수는 “우리 한 잔 해야지?” 하면서 술을 주문합니다. 이 둘은 담배까지 피우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지요. 이렇게 담배까지 피면서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이 못마땅했던 목사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핀다네. 그런데 참 불공평한 것 같아. 목사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당장 난리가 나는데, 신부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건 왜 괜찮은지 모르겠단 말이야.”이렇게 불평스러운 목사 친구의 말에 교수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여태껏 몰랐단 말이야? 신부들은 가장 중요한 ‘동정’을 하느님께 바치고 결혼을 안 했으니 무슨 재미로 사나? 따라서 술, 담배 정도의 재미는 인정해 줘야지. 그런데 목사들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재미 볼 것은 다 보면서 거기다가 술 담배 재미까지 허락해 달라고? 그게 더 불공평한 것 아니야?”
이 교수 친구의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봉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봉헌에 대한 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돈의 액수에 따라 열심인 신자로 구분을 짓기도 하며, 또 그 사람의 봉헌하는 모습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형편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봉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바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꼭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는 자신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와 삶의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그 십분의 일인 2시간 30분 정도는 주님을 위해서 봉헌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전에 앉아 그 시간 동안 기도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게 할 만한 행동 역시 하나의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이 생활들을 봉헌한다면 주님께서는 더욱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기쁘게 봉헌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 것은 혹시 찌그러지고, 병들고, 내게 이차적인 것들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