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서말씀에는 위기에 빠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1독서에는 하느님과 마주한 아브람이 자신이 처한 위기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지극히 영광스러운 선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아브람은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 어떤 영광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한탄합니다. 당시에 가문의 혈통을 이을 수 있는 자녀가 없다는 것은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는 흠이었습니다. 가문에게 있어, 그리고 아브람 자신에게 있어 자녀가 없다는 사실은 위기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말씀하시며,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라 전하십니다. 아브람에게 진짜 위기는 무엇입니까. 그에게 혈통을 이을 자녀가 없어 가문이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위기입니까, 아니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일도 해내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이 위기입니까?
복음서에도 또 하나의 위기가 등장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원치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구원자, 이슬라엘의 메시아 혹은 능력있는 예언자로 소문이 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의 척박하고 답답한 상황을 끝장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헤로데에게 이 사실은 분명 위기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허울뿐인 왕위 자리마저도 시골에서 상경한 목수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했습니다. 헤로데는 이를 막아내기 위해 예수님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이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전달한 것입니다. 일종의 위협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헤로데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입니다. 가야 할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죽음이 턱밑까지 다가 온 이 상황이 예수님께는 위기가 아니었던 걸까요?
예수님은 생명이 위협받는 그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 생명을 걸고 십자가를 짊어 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지 못하는 바로 그 상황을 위기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본 위기와 하느님의 눈으로 본 위기는 다릅니다. 위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맞아들일 위기가 무엇인지를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일상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위기들, 그것들은 하느님의 뜻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혹시 그 위기들은 오직 내 편안한 삶을 위한 위기들, 내 안위와 이기심에 대한 위기들은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위협이 되는 참된 위기는 무엇입니까? 이를 분간할 수만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우리 길을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