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서 본문은 사람들이 마태오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산상설교와 비교해, 평지에서 이뤄졌다 하여 평지설교라 부르는 부분입니다. 이 설교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밤을 지새우시며 기도하신 다음, 열두 제자들을 뽑아 세운 뒤에 선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본격적으로, 이 열두 명의 사도를 통해 온 세상에 펼쳐 가시기 직전, 복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른 평지에 서시자, 많은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려던 여러 제자들과 함께 “띠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까지 몰려 있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 속 깊은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 루가는 사람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묘사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도 고쳐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이라고 대 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그 분의 행동에, 그 분의 모습에 구원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뜨거운 갈망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서, 예수님은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 자체가 곧 행복과 연결되지는 않겠지요. 부요함이나 남의 칭찬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고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자신이 가난하기에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 자신도 슬퍼했기에 지금 우는 이들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뜻일 겁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여한 없이 누리고 사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누군가의 좋은 이웃으로 사는 데서 행복은 옵니다. 이 행복은 경쟁해서 승리해 부요함을 쟁취하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숭배하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너른 벌판에서 예수님의 선포를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우리 또한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이 욕망의 전쟁터에서 나와 너른 평지로, 이웃들의 가난함과 슬픔이 오롯이 보이는 너른 평지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