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자캐오는 세관장입니다. 세리 중의 최고 높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이런 타고난 약점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도 얻었을 것이고,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약점을 이겨내기 위해 무던히 애썼을 겁니다. 그렇게 애쓴 결과가 세관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 받지 않기 위해, 어차피 세리라는 타이틀로 욕먹고 사는 인생, 이왕이면 더 무시할 수 없도록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자캐오가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고, 어쩌면 그 방식은 지금 우리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캐오는 원래 하느님을 섬기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자캐오라는 이름도 ‘순진함’, ‘정결함’ 이라는 의미입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인셈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하느님 앞에서 순진하고 정결하게 세상을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현실의 삶은 돈과 권력으로 힘을 얻은 민족의 배신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왜 내적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세관장까지 되었으니 더 이상 애써 올라갈 곳도 없습니다. 이쯤되면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지요.
그런데 자신의 동네에 예수라는 사람이 온답니다. 먹보에 술꾼,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라는 그가 온답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는 분. 이 분이라면 나를 다르게 만나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자캐오에게 생겼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몰려갑니다. 자캐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자캐오는 쉽사리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당시 돌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일반 무화과만은 못해서 당시 가축 사료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단맛이 조금 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돌무화과를 식량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해보면, 결국 그는 또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간 겁니다. 나 살자고, 다른 이들을 억누르며 또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까지도 그렇게 선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키가 크든 작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부족하든 풍족하든 상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그냥 내려오라고, 더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정받기 위해 덧입고 채우고 오르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래 자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자캐오의 이름처럼 순진하고 정결한 이로 창조하셨고, 다시 내려와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원래 자리를 회복한 자캐오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백에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르고 챙기던 삶에서 나누고 갚는 삶이 진정 구원에 이르게 함을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