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서에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벌어졌던 일을 전합니다. 성지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맞선 반란이 그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었고, 잔혹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화를 내시는 것일까요.
갈릴래아 사람들의 태도에는 예수님의 생각과 맞서던 세 가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갈릴래아 사람들은 누군가 고통받는 이유가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앙이 일어난 이유를 고통받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 말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에게 고통이 닥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깔려 있습니다. 거기다 재난을 피한 자신에게는 상대적으로 죄가 없다는 생각도 담겨 있지요.
고통, 재난, 고난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섣불리 고통의 이유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고통 받는 이 앞에서 이런 태도는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태도, 즉 그 고통스러운 사건은 죽은 이들의 죄 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자신들은 죄가 별로 없어 다행히 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안일한 생각에 크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마주치게 되면,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이 일어났을까?”하고 묻기 쉽습니다. 정말 다양한 대답이 등장하지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라는 대답에서부터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 허락하셨다는 답변까지, 고난과 고통, 아픔의 원인을 찾기 위한 질문은 수도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이에 관해 다룬 이야기들을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서에 등장하는 고통과 고난, 우리에게 닥치는 재난 중에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차릴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누군가의 죄와 책임을 탓하거나 하느님의 섭리를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의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고통을 손쉽게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저 침묵하고, 단지 고통받는 이들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는 것이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필요한 일들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죄 많은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셨듯이, 우리 또한 누군가의 고통을 조용히 위로하고 그 아픔에 함께 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