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말하고, 당장 행동하라.” 기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난 4일 결성된
‘기후위기비상행동’의 요구다. 절박함이 느껴진다. 기후 문제의 대명사로 사용되던 ‘기후변화’는 문제의 심각성을 왜곡한다는 인식 때문에 사용이
뜸해졌고, 대신 기후위기·기후폭력·기후재난·기후붕괴 같은 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후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커졌음을 뜻한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을 1.5도로 막아야 하며, 2도 상승은 기후파국을 뜻한다고 경고한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지금처럼 계속되면, 1.5도 상승까지는 12년 정도가 남았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 정책 결정에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년
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약속했고, 작년 여름 살인적인 더위가 덮치자 폭염은 재난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작 기후위기의 근원인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2020년의 감축목표는 슬그머니 폐기되었고, 2010년 대비 2030년의 감축목표는 국제기준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문 대통령은 오는 23일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하지만, 관심은 한·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다. 그런 우리나라가 2018년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위, 2017년 기준 온실가스 배출량 OECD 4위, 10년간 증가율 2위다. 국제사회에서 ‘기후악당국가’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몸에 조금만 열이 있어도 힘들어하지만 열로 끙끙대는 지구에는 무심하다. 규모가 너무 커서 실감을 못할 수도 있고, 모두의 문제니 누군가 알아서 할 거라 믿을 수도 있고,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죽는다는 것이니 무서운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사이 기후는 악화일로에 있다.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구약성경> 신명기) 사람이 살려고 하는 건 당연한데도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살기 원한다면서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저주의 길을 축복의 길로 착각한다. 착각한 줄 알고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고, 알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생활양식을 근원적으로 전환해야 하고, 그러려면 정부 정책의 과감한 전환이 요구된다. 하지만 화석연료에 중독된 우리에게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삶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하고, 침묵한다. 정부는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같은 대책으로 ‘화답’한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기후재난이 자신들의 미래를 앗아갈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청소년들이 밖으로 나와 외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파업 시위로 물꼬를 텄다. 청소년이나 기후난민의 경우에서 보듯이, 기후 문제는 화석연료를 적게 쓰고 온실가스를 적게 배출하는 쪽이 피해를 더 많이 보는 구조다. 기후위기에 책임이 큰 국가, 집단, 개인은 아직은 피해에서 벗어나 있다. 기후재난은 공정하지 않다. ‘조국 사태’는 우리가 불공정에 얼마나 민감하고 분노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런 우리가 원인과 결과에서 모두 불공정한 기후위기에 침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다.
지난 4월, 프란치스코 교종은 툰베리에게 지금 가는 길을 계속 가라고 격려했다. 지금은 다수가 외면하고 소수만이 걷는 그 길이 바로 생명과 축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9월21일은 ‘기후위기비상행동의날’이다. 이제는 우리 다수가 침묵을 떨치고 힘을 모을 때다. 모두 함께 기후비상을 외치고, 정부와 기업에 비상대책 수립을 요구할 때다. 내가? “그렇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당장? “그렇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