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이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정말 기쁘다. 한국문학에 쏟아진 축복이자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평소 이 소설가를 좋아했던 마음에서였으리. 어제 자정 가까운 깊은 밤,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가까운 지인들과 통화하느라 날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대 요르단 전 축구는 보는둥 마는둥 지나쳐버렸다. 이제서야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론 일찍부터 한강을 유력한 수상 후보자로 꼽아왔었다. 박경리, 이청준, 최인훈, 박완서, 김지하, 고은, 이문열 같은 대가들이 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난 후 나이로 보아 황석영이 먼저 타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장하게도 한강이 어려운 숙제를 먼저 해냈다. 일찍부터 '될성부른 싹'이 보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을 탔을 때에도 이렇게 빨리 꿈이 이루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문학분야 뿐 아니라 서구와 영어권에 편중된 현 노벨상 제도. 아시아 작가로선 한강이 네 번째이고 여성으로선 첫 번째라고 한다. (가와바다 야쓰나리, 오에 겐자부로, 모엔) 어쩌면 이 제도를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세계문학 변방 한켠에 숨어 있는 보석을 용케도 가려낸 듯해 그 명성이 헛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한강은 많은 소설작품을 썼다. 이쯤에서 수상작이 어느 작품인지 궁금해진다.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수상 이유를 보자면, 제주 4.3을 소재로 한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러나 한강을 얘기하면서 빛고을의 5월 18일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뺴놓을 수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야말로 전율했다. 거기에서 시대의 야만과 폭력에 몸서림치면서도 결연히 직시하려는 작가와 만났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여성성, 아니 껴안아주려는 모성, 한 거인이 거기 서 있었다. 과연 그 '소년'은 환생하듯이 우리에게 돌아올까. 이윽고 인간 실존에 응결된 언어가 고요히 침전되면서 가라앉는다. 최신작(2021년) <작별하기 않는다> 끝에 달린 작가의 말에서 한강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정녕 펜은 칼보다 강할까. 현실은 엄연히 칼이 더 강하다고 속삭인다. 문학은 우리를 구원하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그러나 문학은 그 지점에서 다시 도약해야 하리. 그러할 때 현실의 질곡은 해방구가 된다.
(영어)번역도 단단히 한몫으로 공헌했을 것 같다. 한강 작품 대부분을 영역한 이는 영국 처자 데보라 스미스였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밀도 있고 정밀한 문체의 원작과 놀랍도록 밀착 호흡하면서 창작 수준의 번역문을 성취했다. 주요작품인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도 데보라가 영어로 옮겼다(제목은 The Vegetarian, Human Acts). <작별하지 않는다>도 데보라가 했는지 모르겠다. 번역문제를 꺼내면 으레 이런 질문들과 부딪친다. 언어장벽은 물론 켜켜이 쌓인 문화적 지층, 미묘한 말결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어 아닌 다른 언어들(비영어권)은 어떨까. 하지만 데보라의 번역을 보라. 모두 다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을 문학대국으로 불러도 된다. 섬세하고 미묘한 '말놀이'에서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노자의 <도덕경> 영역본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창작품이다.
이제 물꼬가 트였는가. 제2, 제3의 한강이 이땅에서 이어지기를 고대해본다. 그리고 이제는 문학상 너머 물리학상, 경제학상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을 걱정할 겨를이 없는가. 더 나아가 아시아 문학이 세계무대에 당당히 나서기를 희망해본다. 전쟁의 참화에 시달렸던 베트남, 평온할 날 없는 미얀마, 이슬람 대국 인도네시아, 호세 리잘의 고향 필리핀, 지역강국 말레이시아... 아시아의 문학 토양은 비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