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자 신문에 내로라하는 현역 작가들의 대담이 실렸다. 문학 원로들도 보이고 소설<Pachingko>로 유명한 재미 작가 이민진의 얼굴도 보였다. 그 중 젊은 층에 속하는 소설가 김영하의 발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사어가 될 뻔한 한국어가 세계시민의 언어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문필가다운 멋진 접근이라고 느꼈다.
반면에 칼로 벤 듯 대척점에 서서 수상 작품들을 마구잡이 식으로 깎아내리는가 하면, 노벨상 권위 추락과 수상을 둘러싼 정실 의혹까지 날것 그대로 뱉어내는 소리가 슬그머니 등장했다. 일반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 김규나 소설가. 이 젊은 여작가는 무얼 말하고 싶고 누굴 대변하고자 하는 것일까. 금방 봐도 억지에 가까운 폄훼 말고는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주장으로 보였다.
하지만 배경에 깔린 의도를 알아채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왜곡된 역사가 박제화”할 위험이라... 참 편리하게도 어김없이 특정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 비록 전면에는 짐짓 올바른 역사관을 내세웠지만 발언자는 결국 제주 4.3과 빛고을 5.18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발언 중간에 끼인 오쉿팔(5.18?)이란 조롱의 언사는 김 작가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작 <소년이 온다>(데보라 스미스의 영역판 Human Acts). 그 무대가 5.18임을 뒤늦게 알게 된 가까운 지인. 부랴부랴 한강 성토 대열에 휩쓸려버렸다. 이런 희극이 따로 없다.
오래 전 데보라의 영역판을 읽었을 때에도 감동의 물결은 잦아들지 않았다. 책을 덮었을 즈음엔 아픔과 번뇌, 한의 강줄기가 씻김굿하듯이 넓은 보편의 바다와 만나는 상상을 하게끔 이끌려 갔다. 그건 외국 처자가 옮긴 저작물에서 씻김굿이란 한국문화를 역체험하게 되는 기묘한 순간이기도 했다. 문학과 역사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리라. 문학이 역사와 맞절하며 조우할 때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쟁투와 갈등이 한껏 단계를 오르며 승화하기, 말하자면 나는 그곳이 한강 문학이 지향하는 세계라고 믿는다. 우리 사회엔 걸핏하면 이념을 덧씌우려는 세력이 있다. 그런데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나는 조금 다른 걱정을 하게 된다. 한강 문학의 감수성과 영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폭력적 현실과 그 아래 짓눌리는 인간 실존이 양대 축이다. 최근작(2021)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사랑을 환기했다. 사랑의 다른 말은 생명이련가. 그리고 앞으로 역사소설은 더 이상 안 쓰고 생명을 주제로 쓰고 싶다고 했다. 웬일일까.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부터 작가 한강은 꽤 풍족한 부를 누릴 만한 처지가 됐다. 또한 지금까지 한 작가의 등을 떠밀어 왔던 문학적 추동력이 있을 터이다. 겸손한 인품과 성실함이란 미덕에 비춰 설마 그 나이에 동력이 소진될 리야 없겠으나 문득 그런 데로 생각이 미쳤다. 노벨상의 영광이 사상 최초로 남한 여성에게 주어졌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함의를 덧붙이고 싶다. 그건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 주어졌다는 점이다.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분단이야말로 크나큰 폭력이다. 생명. 그 가없는 ‘보편’의 대지에 한국이란 ‘특수’가 매몰되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