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소설가


4월이 지나간다. 생명이 약동하는 4월이 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시간과 네번 마주친다. 첫번째 마주치는 시간은 나에게 <순이 삼촌>으로 먼저 다가오는 ‘제주4·3사건’이다. 현기영이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한 것은 ‘제주4·3사건’ 30년 후인 1978년이었다. “제주도를 초토화시킨 4·3의 대참사를 겪은 유년의 기억이 문학의 근원”이라고 토로한 현기영은 “4·3의 억압을 조금이라도 말하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은 개인적인 절박함 때문에 <순이 삼촌>을 썼다”고 밝혔다. 발표 후 현기영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한달간 보안사에 갇혀 있으면서 ‘화탕지옥의 시간’을 겪었다.


‘순이 삼촌’의 고향 마을에는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오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살육의 장소는 ‘순이 삼촌’의 밭을 비롯한 네개의 옴팡밭이었다. ‘순이 삼촌’은 자신의 밭에서 두 아이를 잃었다. 자신은 시체 무더기 속에 파묻혀 까무러쳐 있었다. 두 아이의 봉분이 있는 그 밭에서 ‘순이 삼촌’은 30년간 김을 맸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나오고 녹슨 납 탄환이 부딪혔다. 총소리의 환청은 조용한 대낮일수록 자주 일어났다. 옴팡밭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순이 삼촌’은 어느 날 그 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주의 비극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과정에서 흘린 피였다.


4월의 두번째 역사적 시간은 4·19혁명이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압살된 자유가 4·19혁명을 통해 싱그러운 생명체로 숨쉬기 시작했다. 최인훈의 <광장>은 그 싱그러운 생명체가 잉태한 소설이었다. 남과 북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고뇌하던 이명준이 판문점 포로교환 때 남과 북을 거부하고 인도로 향하는 배를 탔으나 결국은 바다에 투신한다. 이명준의 투신은 4·19혁명 체제가 일년 만에 5·16 쿠데타로 무너진 사실에 대한 절망적 상징이었다.


4월의 세번째 역사적 시간은 세월호 참사다. 배가 침몰했고, 마땅히 구조되었어야 할 생명들이 수장된 이후 한국 사회 공동체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았던 것들, 보이지 않았기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생각하지 않았기에 행동하지 않았던 것들이 공동체 전체에 벼락처럼 내리쳤고, 그 ‘죄의 진창’ 속에서 공동체는 비로소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었다. ‘촛불혁명’은 그 변화의 간절한 표현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간이 ‘혁명의 시간’이었음을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 확인했다.


4월의 네번째 역사적 시간은 ‘판문점 선언’을 낳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다. 한국 사회 내면 깊숙이 축적되어온 과도한 폭력은 증오의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는 냉전체제와 깊이 연결된다. 분단이 만든 기형적 국가권력이 냉전체제 유지를 위해 공동체의 구조와 의식체계를 조직해왔기 때문이다. 4월27일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더 나아가 이날의 의미와 열망을 역사의 새로운 생명체로 승화시켜나가야 하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냉전체제 해체를 위한 가장 구체적인 로드맵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28일 ‘DMZ평화인간띠운동본부’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DMZ민(民)+평화손잡기 발대식’을 열고 “판문점 선언 1주년인 4월27일 14시27분에 맞춰 70여년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 동서 양끝인 고성~강화 500㎞의 길 위에서 50여만명이 평화를 염원하는 인간띠잇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DMZ민+평화손잡기’ 행사는 ‘발트의 길’에서 영감을 받았다. 인류사의 대전환기였던 1989년 8월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시민 200만명이 상상하기도 힘든 620㎞의 인간띠를 만들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열망을 표현했다. ‘발트의 길’로 불리는 그 장대한 퍼포먼스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정보통신 수단이 없었던 당시 세 나라 전체 인구 600만명 가운데 30%가 넘는 시민들이 참여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발트 3국은 1991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한 것이었다.


내가 ‘DMZ평화인간띠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촛불혁명의 에너지가 냉전체제 해체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4월27일 비무장지대를 감싸는 길이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에 의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는지 기대가 된다.



출처: 2019년 4월 26일[한겨레] 신문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4·27 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1년 전 남북 정상이 처음 조우한 군사분계선에서 미국의 첼로 거장 린 하렐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판문점/사진공동취재단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4·27 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1년 전 남북 정상이 처음 조우한 군사분계선에서 미국의 첼로 거장 린 하렐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1번을 연주하고 있다. 판문점/사진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