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한가위를 소망하던 무렵에 열렸던 이번 남북정상회담. 정말이지,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남겼다. 먼저 규모부터 대단했다. 공식 수행인사들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계 사절단에다 취재진까지 더해졌다. 거의 실시간으로 티브이가 비춘 평양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남녘 동포들을 환영하고자 길거리에 몰려든 평양 주민이 10만 명이라 했다. 구호 “조국통일”을 외치면서 붉은 꽃술을 흔들며 문 대통령을 맞이하는 북녘 주민들. 실상 그 격정에 찬 장면은 낯설지 않은 편이다.

어쩌면 익히 봐왔던 풍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전과는 뭔가 다른 모습에 감전되듯 시선이 꽂혔다. 살림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일까, 한층 더 풍부해진 북녘 사람들의 표정들이 먼저 잡혔다. 말하자면 거대한 군중의 물결 속에서 수몰되지 않은 ‘개인’의 얼굴이 비쳤다고 할까. 그 개인들과 손을 잡고 나서 허리를 깊숙이 꺾고 인사하는 남녘 대통령. 일순 대열이 무너지며 당황한 듯 싶은 때, 카메라는 인간 물결을 헤집고 파문이 이는 개인의 무늬들을 놓치지 않고 보여줬다.

짐짓 놀랐다. 도처에서 그러한 ‘개인’을 발견했기에 그랬다.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두 정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파트 고층 주민들, 백화원 직원들과 묘향산의 안내원들, 대동강 수산물시장에 저녁 먹으러 나온 주민들, 나무를 심은 뒤 기념사진을 찍은 학생들...심지어 능라도 5.1 경기장을 빽빽이 메운 15만 인파에서도 그런 기운이 감지됐다. 그런 가운데 설핏 스쳐가는 아이들과 학생들의 싱그럽고 어여쁜 자태. 중계방송에 감질났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음 속이 상했다.

사흘 내내 함께한 두 정상들 내외. 이 모든 게 분단 70여 성상 기록들을 갈아치운 최초의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9월 19일, 평양 5.1 경기장에서 남녘 지도자가 환호하는 15만 군중을 향해 연설했다. 시대를 가름직한 연설이었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의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한다.” 1989년 11월, 동독 드레스덴에서 연설한 헬뮤트 콜 서독 수상의 모습과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