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서야 조미리암 자매님이 "성공회를 사랑하는 모임(성사모)"에 올린 글을 읽었다. 정호철 신자회장이 일러준 대로 설날 예배를 마친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추념하는 글을 올리다 보니 그만큼 댓글을 늦게 다는 셈이 돼버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제일 크게 작용한 것은 추도문이란 고인과 가장 가까웠던 이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바람을 조미리암 시인이 대신했는가... 그런 것 같다. 찬찬히 전문을 톺아볼수록 시인다운 간명한 언술이 깊은 울림을 준다. 하여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간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이 한 훌륭한 교우를 기리는 마음을 몇 갈래의 문단으로 나눠 싣게 된다.
내가 차준명 형을 처음 본 날은 필경 아니었을 게다. 어쨌든 견진성사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2000년대 초반 쯤, 서울 면목동 어느 식당에 바우로 회우 십여 명이 모였을 때다. 당시 관할사제였던 최승철 마태 신부도 함께했었다. 술잔이 오가는 왁자한 분위기였음에도 나는 준명 형에게 금방 눈길이 쏠렸다. 웃음기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 나지막이 발화하는 어조에서 상냥함과 배려심을 읽었다.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면서도 중요 대목에선 자기 의견을 거르지 않고 개진한다. 한데도 전혀 논쟁적이지 않았다. 의견이 갈리더라도 날선 반론은커녕 사람 좋게 웃어 넘긴다. 게다가 박식해 보였다. 문득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반면에, 얘기가 달궈질 성싶으면 영락없이 언성이 높아지고 표정이 바뀌기 일쑤인 내게 그건 놀라운 내공이자 부러워할 만한 미덕이었다. 이같은 첫인상은 오래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도대체 성을 내거나 거친 언사를 내뱉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교우들의 말도 한결같았다. 막걸리를 즐기지만 아무리 술에 취해도 결코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고. 난처하거나 못마땅한 지경에 처하면 다소 굳어진 얼굴에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할 따름이었다. 이쯤이면 부부싸움 같은 거는 어떻게 수행했을지 궁금해진다.
차준명은 아주 오랜 기간 교회위원으로서 교회살림을 알뜰하게 챙겼다. '교력'이 짧은 나로선 그 봉사기간이 얼마인지조차 모른다. 어렸을 적 꿈이 성직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태신앙을 고이 품은 채 교회문을 주저없이 두드렸으리라. 조미리암도 준명 형을 깊은 신심의 소유자로 호명했다. 공감한다. 칠십 평생 쌓아 올리고 벼려냈을 견결한 신앙 앞에서 나는 겸허해지고 침묵한다. 그런데 언제였던가 준명 형이 물었다. "복잡한 전철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전도하는 사람 어떻게 봐요? 또 예전에 골 하나 넣으면 운동장에 무릎부터 꿇고 기도드리는 축구선수들 어찌 생각해요? " 궁리 끝에 답했다. "볼쌍사납죠. 목적이야 좋은데 방법이 틀리지 않았을까요. 요새 사람들이 그 따위 전도방식으로 과연 기독인이 될지도 의문이고요." 옹색스러운 답변이었던가 보다. 시차를 두고 두세 번쯤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지셨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형의 속내를 이렇게 읽었다. '궁극의 진리이자 구원의 길이라면 그 정도 작태쯤은 용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례로 아프카니스탄에서 샘물교회 신자들이 참변을 당했을 때 준명 형이 보인 반응은 결이 달랐다. 나는 우리 젊은 크리스천들이 보인 무모한 행태와 그 배면의 몰역사성을 비판했었다.
이렇게 물어보자. 전 생애를 특정이념에 몸바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흔할까. 신학적 체계나 교리를 궁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가? 온전한 앎이란 사혜思慧 너머 마침내 수혜修慧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무얼 얘기하려는가? 사람은 모순의 존재다. 진보적 사고를 하는 이도 때로는 보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때때로 준명 형에게서도 비슷한 면모를 본 듯 해서다. 크리스천으로서 종파나 교세에 전혀 둔감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이른바 '번영신학'에도 흥미를 느끼시지 않았는가싶다. 생태 감수성이 결코 낮은 분이 아닌데도 장래에 관한 한 천연의 낙관파로 보였다. 이에 대해 형은 이렇다 하면서 밝히 드러내며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기록된 글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이란 그 어떤 모진 환경에서도 결국 살아남지 않겠느냐고. 설마 하느님이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겠냐든지. 당연하겠지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는 형의 시선은 따뜻했다. 정력적으로 글을 올리셨던 "성사모" 매체는 종교 간 대화를 역설하고 화해와 일치를 강조한다. 그런데 늘 함께하고 싶은 '현장'에 준명 형은 없었다. 강고한 반이슬람 정서는 뜻밖이었다. 요컨대 직접행동에 얽매이기엔 자유로웠고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기엔 심지가 굳었다.
그래서일 게다. 정말이지 4~5년 전부터는 친밀하게 지내지 못했다. 교회 홈페이지와 <성사모> 까페에서 그토록 서로 많이 만났어도 댓글 교신횟수 또한 대폭 줄어들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병문안 한번 제대로 안 가고 헛된 문자만 날렸다. 그러나 모두 하찮은 분별일 뿐, 차준명 니콜라는 훌륭한 성공회교인이시다. 그이는 사회 참여형 신앙인이었고 나는 그런 형을 에누리없이 좋아했었다.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 그릇된 선교방식, 대형교회를 진원지로 터져 나오는 비리와 갖가지 추문에 개탄하며 매섭게 비판했다. 사실 그러한 교우도 드문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젠더 감수성도 구태를 벗어나 말쑥했다. 매서운 반면에 맑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워 '차준명다웠다'. 그런 인물이 고통스런 병상에 누워 절절한 소통의 엽서를 사이버 공간에 띄우는 모습이라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아프다. 또 있다. 지난 해 늦여름이던가 초가을 무렵, 병문안을 마친 석광훈 모세 신부께서 바우로 회우들께 말했다. "교우님의 병이 깊어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서... 그런데 차준명 교우님 이런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더군요." 뭐랄까, 쿵하고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거인의 위엄이 거기 있었다. 안타까움과 슬픔을 삭히려는 듯 마른 침을 삼키는가 아무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연령집단으로 보면 형은 '한글세대'에 속한다. 4.19 세대의 막내 쯤으로 연결지어보지만 아무래도 무리다. 정치사회적 문맥이 탈색된 한글세대란 이름. 그러나 해방 이후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역동적 변화의 소용돌이를 통과해온 고난의 세대다. 그래서 비록 공인된 이름은 아니지만 산업세대란 이름도 어울린다. 근대국가의 국민화 과정 속에서 반공교육과 동원문화에 훈육되는 가운데 가난 극복을 지상과제로 떠맡았던 사람들. 어느 세대이든 그 집단적 의식이 빚어내는 지향, 가치의 자장을 벗어나긴 힘들다. 바야흐로 남북화해 시대를 보면서 차준명 교우가 그래서 자랑스럽다. 적어도 냉전적 체계가 강제하는 양분법적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 그러하다.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약동하고 갱생한다. 준명 형이 좋아하고 사랑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인터넷을 유영하며 새로운 정보를 얻고 전자우편으로 소통하는 일, 세월이 가도 빛 바래지 않을 경구와 금언, 중보기도문,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기록, 모든 음악, 그 중에서도 발라드 팝송, 조용필의 "허공", 예쁜 꽃 그림, 반듯한 액자 속 중세풍 옷으로 성장한 여인들이 오롯이 담긴 유화, 어머니, 막걸리와 친구들, 미국 배우 오드리 헵번. 영화 <파계> 속 수녀님들.
1월 24일 밤 장례식장 별세기도 시간. 가족들과 십수 명의 교우들, 천상화 요한, 한주희 한나, 양지우 루가 신부가 한자리에 앉았다. 사진 속 준명 형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조금 몽롱해지면서 도무지 현실감을 찾기 어려웠다. 양지우 신부께서 일어나서 기도하신다. "고인을 보내는 교우들이 똑같이 탄식하십니다. 이제 그 아름다운 미소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느냐고요." 일순 하마터면 무릎을 칠 뻔했다. '그렇구나, 온유한 미소가 차준명의 아우라였구나.' 뭔지 몰라도 말끔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교우 몇몇과 잠시 밖에 나와 밤공기를 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 저기 가까운 곳에서 풍채 좋은 이의 윤곽이 움직이며 다가온다. 그런데 그 걸음걸이을 보고 감전되듯 화들짝 놀랐다. 준명 형의 큰 아드님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그날 불 밝힌 실내에서 대면하긴 했으나 실상 아드님 두 분은 처음 만났다. 고즈넉한 눈매, 듬직한 체구와 걸음걸이, 준명 형이었다. 이것도 모종의 깨침이라 할 수 있을까? 시간을 할애해 곰곰이 생각을 모아봐야겠다. <성사모> 회원 조미리암 교우의 기도를 반복해 싣고 싶다.
"하느님, 착하고 성실하게 이 세상을 살다간 차니콜라 님의 영혼을 당신 품에 따뜻이 안아주시기를 바라오며 두손을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