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쌍용차가 남았다
이호준 경제부
출처 : 2018년 7월 25일 [경향신문]
KTX 여승무원들을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당시 신참 경찰기자로 중부·남대문 경찰서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담당 지역이 서울역을 끼고 있다는 이유로 KTX 여승무원들이 집단농성을 벌이고 있던 경기도 양평으로 출장을 나갔다. 농성장에서 만난 승무원들은 이제 겨우 학교를 졸업한 티가 역력한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승무원들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이렇게까지 길고 끈질긴 싸움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
2004년 KTX 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철도공사는 한껏 바람을 잡았다. ‘레일 위를 달리는 여객기’에 걸맞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겠다는 모집 공고도 내걸었다. 하지만 정작 고용 주체는 공사가 아닌 외주회사였고, 그마저 정규직도 아니었다.
2006년 철도노조 총파업에 여승무원들도 힘을 보탰지만, 노조는 파업을 철회한 뒤 현장으로 돌아갔고 직접고용을 요구한 여승무원들만 남겨졌다. 파업과 농성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해고였다. 그리고 이어진 단식, 삭발과 쇠사슬 연좌농성. 사진이나 제목이 나올 만한 몇몇 사건들이 지난 뒤 소식은 뜸해졌고 그렇게 싸움은 끝이 난 것 같았다. 여승무원들이 다시 조명을 받은 것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하면서였다. 이제는 아기를 안고 업은 여승무원들이 재판정 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대법원의 파기환송과 한 여승무원의 죽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승무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이들은 마침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냈다.
비슷한 시기에 믿기지 않는 기적같은 이야기는 또 있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숨지며 촉발된 ‘반도체 백혈병’ 분쟁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던 택시 뒷좌석에서 황유미씨가 숨을 거둔 지 11년 만이다. 유족들의 싸움도 처음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애초에 황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한 산업재해 신청을 불승인했다. 법정다툼 끝에 2명에 대한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받아냈지만 근로복지공단이 불복해 항소, 고등법원까지 가서야 법정싸움이 마무리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마련됐지만 중재안 수용을 두고 양측이 대립하며 해결은 요원해 보였다. 수년간 침묵하던 조정위가 지난 18일 갑작스럽게 2차 조정 개시를 알리면서 사태는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반올림 양측이 앞으로 나올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고 밝힌 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며 눈물을 쏟았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우리 사회의 묵은 숙제들이 갑작스럽게 해결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쌍용자동차 사태 해결에도 기대를 걸게 된다. 2009년 경영난을 이유로 회사 측이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시작하면서 불거진 쌍용차 사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5년 12월 쌍용차 노사가 단계적인 해고자 복직을 추진키로 합의했지만 복직 희망자 가운데 45명만 일터로 돌아갔다. 119명은 아직 거리에 있다. 앞서 지난 10일 인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쌍용차 대주주인 마힌드라그룹의 마힌드라 아난드 회장을 만나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면 감사하겠다”고 당부했지만 아직까지 쌍용차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3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다시 분향소를 차렸다. 2012년 대한문 앞을 떠난 지 5년여 만이다. 그때 22개였던 걸개 그림 속 영정은 2018년 30개로 늘어났다.
평택 가는 사이렌
노혜경 시인
출처: 2018년 7월 31일 [한겨레]
2009년은 끔찍한 해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고자 헬리콥터가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최루액을 들이붓고 특공대가 테이저건을 쏘며 공장 지붕으로 뛰어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용산참사의 불타는 망루를 지켜본 다친 심장이 자본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정경합작의 군사작전에 또 한 번 다쳤다.
그 쌍용차 공장은 평택에 있고, 평택 방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되어 달려가는 꿈을 몇년 동안 꾸었다. 멀어지면 덜 아프고 가까워지면 좀 더 아파오는 습관적 통증. 누군가에게는 바로 심장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저 멀리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할 터, 그 ‘사이렌’ 몰고 당신의 내장으로 쳐들어가고 싶다고 상상하면서.
그런 다음 2012년 4월이었다. 2009년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줄줄이 세상을 뜨다가 급기야 22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노조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려 이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이 기억해줄 것을 촉구하기로 했던 날. 천막은 경찰과 용역에 의해 뜯겨나가기를 반복한 끝에 급기야 돌확으로 분을 만든 화단에 밀려났다. 나는 경찰이 천막을 때려부술 때 거기 있었고, 화단을 만들겠다고 천막을 밀어낼 때 거기 있었고, 그런데 당사자는 아니고 연대자도 아닌 채로 거기 있었고, 그 부끄러움을 겨우 한 편 시로 썼다.
참 징그럽던 세월이었는데, 복직 판결을 받아놓고도 계속 지연되기만 하는 그 날짜에, 그 희망고문에 지친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버렸다. 서른번째다. 이번에는 경찰 대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 부대가 천막을 때려 부쉈다. 죽음이 비단 쌍용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겉보기엔 소규모 자본가처럼 보이던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하청업체 대표가 목숨을 끊고, 태움에 지치고 과로에 지친 대형종합병원 간호사가 세상을 버리고, 일자리 없어 노동자도 못 된 이도 죽고,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 이어진다. 그러니 이 분향소가 비단 고 김주중 조합원만을 위한 것이랴.
쌍용차가 고작 100명도 안 남은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인건비가 부담이 되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르는 일에 총대를 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로의 개편. 거기 사람이 설 자리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경제신문들은 습관처럼 “문제는 경제”를 외치며 정부를 압박한다. 기업 하기 어렵다, 자영업자가 괴롭다를 외친다. 하지만 고작 몇십명의 해고노동자를 기만하며 복직을 미루면 그 경제가 좋아지는 건지를 취재하는 경제신문은 없더라. 이름만 자영업자지 알고 보면 사장이란 이름의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노동자를 살려내는 경제가 어떤 건지를 이야기하는 신문도 없더라.
그래서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시키는 것은 이리 어렵다. 우리는 지금 변곡점에 서 있다. 동북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사회 전체가 불안정하다. 사람들은 대량으로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리는 중이다. 난민이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뿌리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전쟁 같은 삶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체제가 거대한 전환을 넘어 거대한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래된 경제질서는 무너지는데 새로운 질서는 아직 안 왔다. 새로운 질서, 노동이 다시 밥이 되는 새 질서.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촛불 드는 것밖에 없는 무기력한 시인은 연대의 시낭송회를 열어 오래된 시를 바치는 것 말고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다.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벼랑으로 누군가가 또 떨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시 대한문. 멀리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 자꾸 들린다./ 이 소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알리는 소리./ 차츰 가까워진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겨울비처럼 내리는 봄비 맞으면서 사람들은 평택 간다는데/ 평택에서 울리는 사이렌은 멀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불행인 것일까./ 귀 막고 엎드리면/ 왼쪽 가슴팍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내장을 빙글빙글 헤집고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