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자유하시라
이병철 시인
출처 : 2018년 7월 27일 [경향신문]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죽음을 앞둔 마음은 참담했을까, 두려웠을까, 미안했을까. 17층과 18층 사이 창문틀에 서서 그가 본 세상의 마지막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태양은 뜨겁고 나무는 울창하며 매미는 요란했겠지. 아파트 너머 남산과 서울타워를, 한강을, 서울역 노숙자들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을, 노동자들의 눈물이 흐르는 청계천을 보았을 것이다. 몸이 곧 폐쇄됨을 알아차린 감정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울었을 것이다. 속으로 삼킨 비탄이 칼날처럼 폐부를 찔렀을 것이다. 정직한 사람만이 설 수 있는 부끄러움의 높이에서 몸을 던졌을 때, 폭염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이 그의 숨을 거두어갔다. 언제나 ‘바닥’을 향했던 한 생애가 그렇게 저물었다.
진보정치인이자 대중정치인, 용접공 출신 노동운동가, 위트 있는 달변가라는 것 등 드러난 생애 외에 나는 노회찬을 잘 모른다. 잘 모르지만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한 삶이 저토록 많은 이들을 설득하고, 공감케 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구나, 그가 추구한 가치와 신념 쪽에 함께 서주지 못했구나, 안타까움과 후회는 늘 한 걸음 뒤에 온다.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가 현실보다 앞에 있고, 현실보다 위에 있어서, 그 거리와 낙차가 생명을 버려야 할 만큼 벌어질 때가 있다”고 쓴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의 SNS 글을 읽고 목이 멨다. 그 ‘진보의 높이’에서부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뻗어 내린 수직의 인양줄이 현실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를 평화인, 문화인, 자유인이라고 칭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편에 늘 서 있었다. 쨍쨍한 고통과 슬픔의 자리에 방치된 자들, 대낮 같은 수치와 모욕, 멸시와 냉대에 무방비로 노출된 자들의 대숲과 오두막이 되어주었다. 빈민, 노동자, 장애인 등 약자들과 함께 어깨를 부여잡고, 팔짱을 끼고, 울고, 소리쳤다. 청년 시절 유신독재에 반대하고, 노동운동에 몸 바쳤으며, 정치에 입문해서는 재벌 비리를 파헤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헌신하고, 장애인 차별금지법과 세입자 보호법 등 사회약자들을 위한 활동들을 펼친 것이 그가 ‘평화인’이었다는 증거다.
‘문화인’으로서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인류 문화의 참된 정수가 나는 ‘유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은유적이고 위트 있는 그의 언변은 ‘호르헤 수도사’들로 가득한 정치판의 삭막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고 습윤하게 만들었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국민들이 그의 부드러운 말과 익살을 통해 정치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정치판에 만연한 ‘욕망의 언어’ 대신 그는 ‘희망의 언어’로 말했다. 첼로 연주에 능하고, 영화와 문학을 사랑했던 참된 문화인이었다.
다만, 끝내 ‘자유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물론 그가 지향한 ‘자유’는 사회약자와 민중의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만 불합리한 사회와 기득권의 억압으로부터 그들이 훗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자기 생명을 이웃들이 누릴 자유의 마중물로 쏟아놓고, 그 자신 스스로 굴레와 멍에, 모욕, 죄책감을 짊어진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한평생 꿈꿔온 소외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을 이 땅에 남겨진 자들이 가꿔갈 때, 그는 비로소 ‘자유인’으로 완성될 것이다.
부고를 듣던 날부터 지금까지 노래 한 곡이 내내 마음을 떠돈다. 오래전 본 한 연극에서 들은 ‘맹인가수의 노래’다. 그의 빈소에 못 간 대신 멀리서나마 이 노래를 영전에 바친다. 부디, 자유하시라.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 가리라. 등불 하나 켜들고 새소리 물소리를 실어 오리라. 마침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우리 마음은 저 캄캄한 밤안개, 그러나 세상은 슬픈 바다일지라도 등불 하나 켜들고 나는 기다린다. 아름다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