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4월 27일, 아침부터 밤이 깊도록 티브이 앞을 떠나지 않았다. 채널은 판문점 부근에 임시 스튜디오를 차린 한 방송국에 고정시켰다. 자정 가까이 남북정상회담을 내내 좇아 다니다 티브이를 끄고 잠을 청했다. 일찍부터 회담이 성과를 크게 거두리라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덕분에 꿀잠을 잘 수 있었다. 한데 자긍심에 바탕을 둔 성취감일 법하건만 조금 복잡한 감정이었다. 거기엔 모종의 허망함 같은 게 섞여 있는 듯했다.
같은 날 한 일간지는 병상에 누운 백기완 선생 소식을 전해줬다. 아흔을 바라보는 이 백발의 투사는 최근에 받은 심장수술로 몹시 여위고 파리했다. 같은 지면에 오른 삽화 속 장준하 선생이 백 선생을 하늘에서 굽어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이보시게, 벌써 여기에 올라오려고 하면 어떡하나. 통일을 보고 와야지.” 그 밑에는 송경동 시인의 산문. 순간 콧등을 치고 가는 그 무엇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림과 시인의 글은 마땅히 ‘통일꾼들’에게 바칠 만한 헌사였다.
방송 중간에 스튜디오 주변에 모인 시민들의 목소리들도 끼어 들었다.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역사적 현장”을 찾은 30대 중반의 여성. 뭉클하다는 소감을 전하면서 옆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여유까지 부린다.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벌인 적이 있다는 비슷한 연령의 남성이다. 또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여럿. 모두 다 차분한 데다 조리 있게 말을 잘 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자를 몰아낸 ‘촛불’에 한껏 고양된 시민정신을 보는 듯했다. ‘이렇게 똑똑한 민족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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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꽃다발을 받아든 북녘 지도자를 유심히 봤다. 어린이들의 등을 정감 있게 토닥여주던 손. 진심이 담겨 있다고 읽었다. 저녁 만찬에서 “고향의 봄”을 부른 제주 어린이 앞에선 잠시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 앞에서 잔뜩 폼 잡아봐야 건질 게 없어서일까. 해 기울고 깜깜해진 시간이었다. 방송 카메라 뒤로 “바람의 언덕”이 보인다. 몇 줄기 조명이 부드럽게 포개지며 아롱진 구릉을 비춘다. 거기서 뛰노는 아이들. 이런!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녀석들 앞에서 눈물을 참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게 텅 빈듯한 기분의 정체였었나 보다. 어쨌거나 이 회담이 거둔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은 한반도의 명운이 걸린 일대 사건이자 동북아는 물론 그 너머 세계사적 의미를 띤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안다. 우리가 선 지점은 겨우 출발선이라는 사실을. 흔히 말하듯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만남이 어디까지나 북미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궈낸 과실들은 달다. 그러니 4월은 찬란하다.
기쁠 땐 기뻐하자. 또한 오늘날의 현자라 할 전략가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우리 스스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평화와 열정은 더없이 소중하되 머리는 차가워야 할 게다.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호주 사는 친구가 전화기 너머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로 떠든다. 그리고 <시드니모닝헤랄드>1면 전체를 뒤덮은 남북한 정상의 사진까지 전송해준다. 이런 보도는 과거 정상회담 때도 없었던 일이라고.
회담이 일궈낸 성과가 그만큼 극적인 데다 알차다는 뜻일 게다. 오늘 아침 일간지에 실린 소설가 정도상의 칼럼을 봤다. 두 지도자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역사를 향한 의지를 강조하는 글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판박이처럼 같을 수가. 어제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자꾸 신뢰를 쌓아 나가자. 진정성은 통하기 마련이며 사람(지도자)이 얼마든지 역사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강대국의 논리와 냉혹한 레알폴리티크에 균열을 내는 위대한 인간 의지.
생전에 독일 통일에 초석을 깔아놓은 빌리 브란트를 생각한다. 그와 함께 실질적으로 통일을 설계한 인물로 불리는 에곤 바가 있다. 생전 빌리는 인생의 친구로 에곤 바를 지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브란트 수상은 열강의 지도자들 사이에 신뢰를 쌓았던 지도자로 칭송을 받는다. 에곤은 이렇게 말했다. “빌리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해서 나쁘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부지런히 만나고 신뢰를 쌓아 나가자. 그 길로 달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