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제임스 시노트 신부, 우리를 떠나다
배선영 기자 | daria20120527@catholicnews.co.kr

▲ 제임스 시노트 신부
(사진 제공 =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시절에 인혁당 사건과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사건 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12월 23일 새벽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85살.
그는 진필세라는 한국명을 지녔으며 평생 한국을 잊지 못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처형당한 8명 중 하재완 선생의 부인 이영교 씨(79)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온 국민과 국가가 외면한 시절에 우리를 얼싸안아 주시던 분”이라며 시노트 신부의 죽음을 슬퍼했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1974년에 있었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직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있다고 발표하며 시작됐으며 이후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도예종 등 8명의 사형을 확정하자, 24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은 9일 이들의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당시 인천교구에서 일하던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 및 공판기록 변조 등으로 조작됐다고 고발했고 진상을 해외에 널리 알렸다. 그는 이로 인해 4월 30일 "비자기간 만료"를 이유로 모국인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영교 씨는 시노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22일에도 문병을 갔으나 상태가 위독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사형 직후 시노트 신부가 항의하다 네 사람에게 들려서 내동댕이쳐지던 모습을 상기하며 “신부님 같은 분이 있어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어 남편의 명예를 회복했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8명은 2007년에 3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정현 신부 또한 “그 엄혹한 시대에 자유롭게 용감하게 진실을 얘기한 분”이라고 시노트 신부를 기억하며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문 신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인혁당 사건과 동아투위 때 시노트 신부를 거의 매일 만났다. 현장에 가면 그곳에 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인혁당 사건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래서 짐 하나 챙기지도 못하고 공항으로 끌려가 추방당했다”고 했다.
문 신부는 시노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20일에 시노트 신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했다. 의식이 분명하지 않던 시노트 신부가 문 신부를 보자 눈도 똑바로 뜨고,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8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변에서 놀라기도 했다.
곁에 있던 4시간여 동안 시노트 신부는 “문 신부, 여기 있어?”라며 자꾸만 문 신부를 찾았고, 문 신부는 “손과 발을 잡아드렸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시노트 신부(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는 1929년생으로, 1961년 인천교구 송림동 본당 보좌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968년에는 인천교구 총대리가 됐다. 1975년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일시 재입국했다가 2003년에 한국에 살기 위해 재입국했다. 그는 죽을 때 안구를 기증했다.
장례미사는 12월 26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있다.
(출처-2014년 12월 23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