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의 양심적 병역거부
황윤 | 다큐영화감독

스물아홉 살의 영화감독. 나이는 젊지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는 영화인 김경묵 감독이 몇 달 전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했을 때, 그가 앞으로 겪게될 고초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다운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그는, 군대에 갈 수 있는, 아니 군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페이스북 ‘병역거부자 김경묵 후원회’에서 그의 소견서를 읽으며, 군대에 가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한 그의 결정을,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뇌를 감히 다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소견서의 키워드, 그러니까 병역거부의 핵심은 ‘두려움’이었다. 군대 내 폭력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특히 지난 한 해 군대는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졌다. “이 같은 참사를 접할 때마다 밀려오는 고통에 숨이 차고 괴로워 인터넷 창을 열기가 두려웠다.
이들의 비극이 나와 무관한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유무형의 폭력을 보고 겪으며 ‘맞더라도 때리지는 말자’고 다짐한 내게, 폭력이 만연한 군대는 유년시절부터 본능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집단주의적 체제가 맞지 않아 고교를 자퇴한 뒤에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 이런 내가 2년 간 정신을 구속당한 채 군복을 입고 총대를 올리며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김경묵의 병역거부 소견서 ‘죽음을 부르는 군대를 거부한다’는 이렇게 이어진다. “윤 일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었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 역시 후임병이었을 때 군 폭력을 당한 희생자였다.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어느새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대물림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악의 체제에 의해서 발생한다.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 적자생존, 우승열패로 지배되는 군국주의 국가에서는 군대뿐만 아니라, 학교와 직장에서 역시 강자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약자를 향한 폭력은 필연적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이름만 다른 같은 형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끊임없이 발생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김경묵이라는 사람이 “군대를 거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라고 말할 때 그 죽음은,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죽음까지 포괄하는 죽음이다. 그 누구에게도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신념의 죽음, 굴욕적인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은 자존감의 죽음, 개인의 자율과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싶은 영혼의 죽음, 평화를 갈망하는 정신의 죽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그의 ‘두려움’과 그에 따른 병역거부는 한낱 소심한 겁쟁이의 도피가 아니라, 개인의 양심과 신념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국가 혹은 군 체제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옥살이였다. 2013년 6월 유엔인권이사회가 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를 통틀어 종교, 신념 등을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해 수감 중인 사람은 723명이고, 이들 중 669명이 한국인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대대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중국과 대치중인 대만조차도 대체복무를 시행해서 긍정적인 효과를 얻고 있고, 많은 국가가 모병제로 전환한지 오래이다.
한국도 2007년 대체복무제가 실행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전면 무효화되었다. 유엔 인권이사회와 자유권규약위원회에서도 한국에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안을 수차례 보냈지만, 정부는 권고안을 무시하고 있다.
(출처-2014년 12월 4일 <경향신문>)
군대 없는 나라, 가능한 현실인가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그 나라엔 군대가 없다던데.” 필자가 코스타리카에 간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의 반응이었다.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책도 있다. 일본에는 평화헌법이 있지만 사실상의 군대가 존재한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도 국민개병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정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국방은 어떻게 하는가. 솔직한 현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2월1일 코스타리카에선 솔리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군대 폐지의 날’ 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66년째였다. 1948년 12월1일, 호세 피게레스 대통령이 수도 산호세의 군사령부 벨라비스타 요새의 벽면을 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현재 국립박물관이 된 그 자리엔 기념 동판이 붙어 있다. 전국 병영은 학교로 전환되었다. 이듬해 채택된 제2공화국 신헌법 12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항구적 제도로서의 군대를 폐지한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8년 대통령 선거는 여론이 극도로 분열된 상황에서 실시되었다. 집권 국민공화당의 칼데론 후보와 야당 국민통합당의 울라테 후보가 맞붙은 선거는 부정 혐의로 얼룩졌고 선관위는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다. 하지만 여당이 불복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재선거를 결의한다.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와중에 대농장주 출신 호세 피게레스가 등장한다. 기존 정권을 비판한 뒤 멕시코 망명길에 올랐다 돌아와 민병대를 조직하여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피게레스는 혼란에 빠진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군과 맞서기 시작했다. 1948년 3월12일부터 5주간 벌어진 내전은 약 2000에서 4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피게레스의 승리로 끝났다.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한 피게레스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한다. 5만 콜론 이상의 자본에 일률적으로 10% 세금을 부과하고 은행을 국유화했다. 국영 전력회사를 설립하고, 바나나와 커피를 독점하던 미국계 다국적기업에 중과세를 매겼다. 여기에 더해 군대 폐지라는 화룡점정을 찍은 뒤 피게레스는 원래 공약대로 단기 집권을 끝내고 울라테에게 정권을 이양한 뒤 퇴진했다.
피게레스가 왜 군대를 폐지했을까. 이 방면의 전문가인 역사학자 메르세데스 무뇨스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원래 특별히 진보적인 성향이 아니었지만 ‘반공 사회주의’라 할 만한 독특한 노선을 취한 인물이었다. 우선, 내전으로 집권한 자신에게 역쿠데타가 발생할까 봐 선제적으로 군을 없앴다고 한다. 이미 1947년에 아메리카 대륙의 집단자위권을 설정한 리우조약(TIAR)에 가입해 있었으므로 해외망명을 떠난 정적들이 공격해 올 경우 국제적 지원을 받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망명한 칼데론 일파를 용공이라고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이들에게 군사지원을 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군대를 폐지함으로써 정권의 자신감과 안정을 과시하려 한 측면도 있다. 소국인 코스타리카한텐 군대 폐지가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 당시 코스타리카가 인구 60만 명에 군병력 약 300명의 미니 국가였으므로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군을 폐지한 데에는 그 전의 역사가 있다. 코스타리카는 19세기 전반에 스페인, 멕시코, 그리고 과테말라 주도의 중미연방으로부터 각각 독립을 했었다. 그때 군대가 일정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 뒤엔 장기적 충돌이나 내전을 겪지 않았다. 기껏 타운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또한 여유 있는 독립 자영농들의 존재로 중앙집권 관료제와 상비군의 발전이 뒤졌다. 게다가 20세기 초 티노코 군부독재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심했고 1921년 파나마전쟁에서 패배한 뒤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군대를 없애도 그것에 반발할 기득권 세력이 미미했던 것이다. 최근엔 여성주의의 영향을 강조하는 연구도 나온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 개혁정책으로 공립학교가 대폭 확대되면서 교육자 대다수를 차지했던 여교사들이 평화, 공존, 애국심의 기풍을 학생들에게 심었다는 것이다.
군대 폐지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이상주의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외국과의 물리적 충돌로부터 국가를 어떻게 지키겠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북쪽 니카라과와의 국경선인 산후안 강 수로 문제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적도 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테러공격에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군대 폐지는 전략적 가치가 낮은 소국에서만 가능한 옵션이지 생존경쟁에 노출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 아닐까. 또한 최근에 콜롬비아로부터 유입되는 마약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이 이 나라 영토에 병력을 파견한 문제가 국내 정치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이 코스타리카는 미국의 보호막 뒤에 숨은 덕분에 군대 없이 살 수 있게 된 나라라고 비꼰 적도 있다.
코스타리카에 군대는 없지만 경찰은 있다. 2012년 범죄통계를 보면 절도가 흔하고 전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394건이었다. 경찰은 연 1억 달러 정도의 예산으로 인력 1만4000명과 차량 280대를 운영한다. 경찰관의 이직률이 높고 장비가 부족하여 경찰용 특별세를 신설하려고 검토 중이다. 무장경찰도 있으며 헬기 2대를 포함하여 비행기 11대와 약간의 해안경비정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기관총, 장갑차, 수류탄 투척기, 야간투시경 등을 갖추고 국경 순찰과 수비를 맡는다. 최근 에볼라 사태로 국경지대 경비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대통령 직속의 정보기관 산하에 소규모 특수개입팀도 편성되어 있다. 마약 관련 범죄가 심각해지면서 경찰의 무장과 과잉대응, 그리고 미군에 의한 위탁교육 때문에 인권단체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치안유지용 공권력과 전쟁용 군대는 엄연히 구분되는 조직임을 기억해야 한다.
군대 폐지가 인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군대 폐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상비군만 없앤 것이 아니라 군과 관련된 모든 활동의 종언을 뜻한다. 방위·군수 산업, 군산 연구개발, 무기체계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투자, 국민동원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군사적 수단이 아닌 비군사적 방식의 안보 개념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군대가 없으므로 안보와 평화를 탈군사화와 중립화라는 개념적 지렛대와 연결시켜 놓았다. 이것을 통해 도덕적 우위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른바 ‘평화배당금’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군비를 교육, 보건의료, 환경, 문화에 투자할 수 있으므로 인간개발지수가 올라간다. 코스타리카 노동자들의 숙련도와 생산성이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인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요즘 새롭게 각광받는 행복지수에서도 상위를 점한다. 국민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권과 평화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통제와 처벌에 대한 태도도 남다르다. 경찰 총수인 공안부 장관의 말이다. “중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는 것이 적십자의 임무라면, 용의자를 법원까지 호송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 코스타리카 거주 외국 은퇴생활자들 토론방에 어느 할머니가 올린 글이다. “미국에는 전쟁, 승리, 패배의 담론이 일상 은유에까지 스며들어 있는데 이곳엔 그런 것이 없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나라 인권 상황이 완벽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높은 범죄율과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유린 등은 이 나라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럼에도 코스타리카 모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이 나라가 군대를 폐지했던 그날, 남한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그만큼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차이가 대안적 안보 개념의 상상을 원천적으로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군에 의존한 안보를 줄이면서 인권·평화의 소프트파워와 외교력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엔 사람밖에 없다고. 우리 시민들의 우수한 머리와 선의지로 창조적 평화를 모색할 순 없을까.
(출처-2014년 12월 10일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