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불복종의 시작, 독서
나는 <정희진처럼 읽기>가 나오기 전부터 이 책을 애독했던 모태 독자다. 어떤 종류의 독후감이든 자신의 시점과 정치적 지향을 드러낼수록 좋다. 또한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장정일 (소설가) | webmaster@sisain.co.kr
(출처-2014년 11월 1일 <시사인> 372호 68, 69면)
지은이의 이름이 제목 가운데 들어 있는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는 서평이자 독후감이자 칼럼이자 비평이다. 나는 여기 실린 글들이 신문에 연재될 때 꼬박꼬박 챙겨 읽고, 어떤 글은 오려서 해당 도서 가운데 끼워두었다. 또 지은이가 언급한 책 가운데 내게 없는 책은 서점에서 구입했고 절판된 책은 온라인 헌책방을 뒤져 찾아놓았다. 나는 <정희진처럼 읽기>가 나오기 전부터 이 책을 애독했던 모태 독자다.
독후감은 책을 읽고(讀) 나서(後) 느낀(感) 것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한 것이다. 서평이나 비평이 독후감보다 급수가 높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독후에 일어난 일이므로 모두 독후감이다. 말하자면 ‘독후감>서평’이라는 건데, 이 공식이 보여주듯 독후감과 서평을 구별 짓는 것은 크기다. 오늘날에는 유명인들이 온통 그 자리를 메웠지만, 서평의 원래 목적은 전공자끼리 전문적인 의견을 교환하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졌다. 거기에 비해 독후감은 필자와 책 사이의 정합성을 따지지 않는 글쓰기다. 이런 일도양단 논리에 따르면, 나는 여태껏 이 지면에 서평에 미달하는 독후감만 줄곧 써온 것이다.
느낌은 지성·감정·의지가 합해진 매우 전인적인 활동이다. 그런데도 느낌에는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분별하는 이성에 비해 변덕스럽고 주관적일 것이라는 오명이 끈덕지게 따라붙는다. 똑같이 책을 읽고 나서의 일인데도 독후감은 왠지 어린 학생이나 초보자들이 쓰는 것처럼 여겨지고, 서평이 고급스럽고 권위 있게 여겨지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숨어 있다. 애초부터 서평(書評)에는 읽은 책을 평가(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훨씬 객관적이고 학술적(전문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지식과 학문은 서평처럼 객관적일까?
ⓒ이지영 그림
“언어는 본질적으로 권력지향적이다. 책의 ‘적통’이라는 문학은 물론이고 연애 지침서 같은 대중적인 심리학 책부터, 힐링·웰빙 관련 책, 요리책, 여행기, 성생활 지침서, 자기계발서, 신앙 간증기, 증권 투자서까지 정치적 입장이 없는 책이 없다. 무색무취처럼 보이는 책도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철학 책이라고 해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육아책이라고 해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부분 정치색이 없어 보이는 책들은 자유주의나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것들이다. 자유주의적·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정희진이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라고 말할 때, 이 주장이 겨누는 것은 지식과 학문을 생산하는 사람의 위치성(positionality)이다. 지식·학문 생산자 개개인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좋은 학벌이라는 위치에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많은 독자들은 객관성으로 포장된 주류의 위치성을 상대화하거나 자신의 위치성에 입각하여 고쳐 읽기를 하지 않는다. 그럴 때 독서는 편향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자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독후감이든 독자의 시점과 현실에서의 위치는 물론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드러낼수록 좋다.
둘째 질문은 전공 영역과 관련한 것이다. 학문과 지식계의 전문성은 과연 최고선일까? 반(反)전공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은이는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은 없으며, 세계관과 사유 방식의 차이가 학문 간의 차이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한 분야만 공부한 전공자보다 더 깊게, 더 많이 알게 된다.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하면 지식의 전제와 지식이 구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전공보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학문이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공의 전제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지식의 목적은 해결(solution)로 전락하고 앎이 아니라 정보만 소유하게 된다.”
‘정희진의 나침반’은 여성학과 평화학
<정희진처럼 읽기>정희진 지음
교양인 펴냄
지식사회학이나 문화이론이 학문과 지식 생산의 계급적·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석하고, 학제 연구와 통섭이 전공이 막아놓은 칸막이 현상에 이의를 제기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삶과 글쓰기에서 나침반이 된 것은 여성학과 평화학이다. 두 학문은 기존 분과 학문의 경계를 의문시하고 학문 간 협력과 횡단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특히 여성학은 지은이의 삶과 글쓰기에 위치성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정희진처럼 읽기>의 주요 방법론인 위치성은 나와 상대가 어떤 역사와 사회구조 속에 있는지를 상대화한다. 그것이 저항과 해방의 조건이다.
2005년에 초판이 나오고 지난해 개정증보판이 나온 지은이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은 어느덧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은 재미없고 뻔한 데다가, 쉽기까지 하다’는 고정관념을 날려버린다. 이 책은 두 가지 도전을 담고 있다. 하나는 남성 가부장 제도에 대한 여성주의의 도전이고, 다른 하나는 중산층·고학력 여성이 중심이 된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에 대한 또 다른(혹은 다양한) 여성주의의 도전이다. 전자는 물론이고 후자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위치성이다. 중산층·고학력 여성의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의 권리 획득과 양성평등이 관심사다. 반면 또 다른 다양한 여성주의는 한 사회의 정상과 비정상을 주관하는 남성주의에 억압된 모든 타자를 ‘명예 여성’으로 불러들인다. LGBT(동성애자·양성애자·트랜스젠더)는 물론이고, 노인·장애인·노숙자·이주노동자 등이 모두 타자화된 여성인 것이다.
남성주의는 군 입대 여부와 직장 유무를 기준으로 남성의 정상성을 판단한다. 군대와 노동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양대 축이자 상호 보완물이다. 지은이는 개정증보판에 추가한 글에서, 장년 남성 실업이나 청년 실업은 나치의 전신인 돌격대나 이승만 시절에 기승을 부렸던 서북청년단과 같은 ‘국내 용병’을 만든다고 말한다. 불안한 일자리와 실업은 남성에게 거세 공포를 일으키는데, 남성 노동계급은 그 공포를 이기고 실추된 남성성을 상쇄하기 위해 남성 고유의 것으로 역사화된 폭력에 의지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 추모장에 나타난 서북청년단 재건위를 예견한 것 같은 저 대목은, 여성주의가 여성 문제를 뛰어넘어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에 자기 담론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과 개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