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구현사제단 앞날을 논하다 (1)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
(출처-2014년 9월 23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정현진 기자 | regina@catholicnews.co.kr)
사제의 고백과 다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는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 체험은 오직 이웃을 위한 십자가의 삶 안에서만 확인되고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제적 삶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제는 십자가를 살아가는 위타적 존재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취한 가시적 징표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의 수락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개인적 정화와 구원은 물론
사회적 해방과 우주적 변혁을 가져온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또한 종교의 위선과 불의한 권력의 산물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온갖 불의와 폭력에 대한 공개적 거부이며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사실 교회는 십자가를 고백합니다.
이에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를 선포하며 역사적 공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과 해방은 정의의 실현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어야 산다는 십자가의 역설과
순교의 길을 몸소 보여주시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제의 삶은 참으로 순교입니다.
사제의 길은 철저한 비움과 십자가의 죽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고자
서품 때의 약속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 우리는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분단의 현실과 아픔인
민족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습니다.
-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하느님을 고백하며
인간이 중심이고 목적인 공동선의 원리가 실현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 우리는 십자가 없이 추구하는 영광의 부활, 그 허상을 부수고
또한 자유와 기쁨이 없는 희생과 고통만의 거짓 십자가 등
그리스도의 진리를 변질시키는 온갖 우상의 십자가,
이 모든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저항하겠습니다.
- 우리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신 성령의 도구, 사랑의 실천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모든 양심인과 연대하여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인간공동체를 이 땅에 이룩하겠습니다.
1999.10.5.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9월 22일 40주년을 맞아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사제단 활동의 앞날을 깊이 있게 모색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그 내용이 길기에 독자 편의를 위해 세 꼭지로 나눠 싣는다.
‘사제단의 활동 평가와 전망’을 주제로 한 이번 학술대회는 정치와 경제 민주화, 인권, 남북관계, 사제단과 교회 쇄신 등 5개 분야에서 지난 40년 활동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활동 전망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각 주제별 발제자는 박명림 교수(연세대), 홍기빈 소장(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김도균 교수(서울대), 김연철 교수(인제대), 박기호 신부가 나섰다. 그리고 각 발제에는 김선욱 교수(숭실대), 최태욱 교수(한림대), 한인섭 교수(서울대), 이우영 교수(경남대), 이정배 교수(감신대)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정의구현사제단 기념 학술대회 (1)
정치 민주화_ 박명림 교수(연세대)
경제 민주화_ 홍기빈 소장(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박명림 교수, “사제단 활동은 사회적 영성, 자기 혁신, 공공성이 만나 이루는 변화”
박명림 교수는 무엇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영성과 공공성이 만났을 때 한 주체가 자기 자신/종교와 세상/타자를 어떻게 함께 이끌고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꼽았다. 또 자기 혁신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종교)가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먼저 새로워짐으로써 전체를 새롭게 하는 ‘거듭남’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2009년 3월 28일 용산 참사 현장에서 행진하는 사제들 (지금여기 자료사진)
이어 한국의 정치 현실 속에서 사제단의 주요 역할은 성소와 피난처, 연대와 연합의 중심 역할, ‘성당’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저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선, 영혼의 안식과 위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념적 방어막이자 탈이념화의 선도, 국제 연대와 결속 등이었다고 들면서, 무엇보다 “시대 중심 의제의 전면적이고 선각적 제기와 각성”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박명림 교수는 사제단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사제단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개입하고 참여할 수 없는 만큼, 의제와 사안의 판별과 구별이 필요하며, 모든 갈등 사안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기술과 사회의 진화에 대한 겸손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또 북한 동포들에 대한 사회영성적 응답, 한국 청년들의 현실에 대한 사목 확장 등을 요청했다.
홍기빈 소장, 사제단의 경제관은 인간 발전을 위한 경제질서 지향
사제단, “부의 불평등은 사회 정의와 인간 해방 차원에서 반드시 지양되어야”
사제단의 경제관과 그 가치에 대해 발제한 홍기빈 소장은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경제 가치는 “경제는 인간의 발전”이라는 명제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70년대 성장 우선, 경제 제일주의에 대응한 것으로 “사제단은 물질적인 번영과 발전으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사회적 환상을 깨기 위해 교회가 사회에 던져야 할 중심 메시지는 이러한 경제적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성의 계발’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홍 소장은 “사제단은 생겨나던 당시부터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주의를 앞세운 개발 독재에 맞서서 인간이 스스로의 소질과 가능성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인간 계발을 경제 민주화 투쟁의 기본 정신으로 삼았다”면서, 이러한 경제관의 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사목헌장 그리고 이를 한국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 함세웅 신부 (지금여기 자료사진)
이어 이러한 경제관에서 특히 부각되는 두 쟁점은 ‘불평등’과 ‘인간 발전’이라면서, 사제단은 무엇보다 부의 불평등은 사회 정의와 인간 해방의 차원에서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했으며, ‘인간 발전을 위해서는 기층 민중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조직하고 권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기빈 소장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사제단이 갖는 경제관은 여전히 “인간 발전을 위한 경제 질서를 향하고 있다”면서, “사제단의 운동과 실천을 낳았던 경제관, 즉 물질적 경제 성장이 아닌 인간의 발전을 ‘진정한 부’로 보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시장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큰 울림과 풍부한 사상적 원천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권과 남북관계
정의구현사제단 기념 학술대회 (2)
인권_ 김도균 교수(서울대)
남북관계_ 김연철 교수(인제대)
포악한 법질서의 토대를 무너뜨린 희망의 공의
법과 인권, 정의 분야에서 사제단의 역할을 규정한 김도균 교수는 사제단의 활동을 “시대를 바꾼 정의의 힘, 포악한 법질서의 토대를 무너뜨린 희망의 공의(公義) 운동”이라고 봤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이 최소한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 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1974년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 혐의로 연행됐던 지학순 주교의 양심 선언 중)
▲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의 젊은 시절
유신 독재와 군사 독재의 법적 기반은 유신헌법, 긴급조치, 반공법, 사회안전법 등 각종 악법과 이를 정당화해 주는 율법주의(법실증주의)였다고 설명한 김 교수는, “사제단은 악법 적용의 상황에 놓인 법률가들에게 악법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기초와 용기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또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향한 저항권의 정당성, 율법주의에 대항하는 자연법 논리, 대한민국 법질서에 내재하는 공적 법가치를 위한 기초와 통로를 마련해 법질서 쇄신을 위한 희망의 근거를 마련했으며 공동선에 기초한 정의와 인권의 이론적이고 실천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김도균 교수는 사제단이 지금까지 지켜온 ‘공의’를 앞으로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황마다 다른 정의 관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적인 정의 관념, 공적 차원의 주장과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인 정의 관념 사이에서 ‘공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권력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에 기반한 ‘정의의 토양’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제단의 통일 운동, 교회 내 통일 관점을 선교에서 민족통합으로 전환
남북의 화해와 통일, 평화를 위한 사제단의 노력은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김연철 교수는 우선 가톨릭 교회 내에서 사제단의 역할은 통일 문제를 다루는 관점의 전환이라고 봤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통일 문제에 대해서 민족의 재통합을 강조하거나 교회의 재통합을 강조하는 이른바 “사목적이거나 선교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었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사제단이 통일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짐으로써 “민족통합적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1989년 임진각의 통일염원미사, 문규현 신부의 방북,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으로 이어진다.
▲ 1989년 방북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왼쪽 네 번째) (사진 출처 = 문규현 신부 홈페이지)
이같은 활동은 교회 내부 심지어 사제단 내에서의 갈등과 진통까지 불렀지만 사제단은 1989년 “남북한 상호 비방과 적대행위 중지, 평화협정 전환과 불가침 선언, 핵무기 철폐,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등을 주장하는 ‘민족 통일을 향한 우리의 시도와 선언’으로 입장을 결정했다.
김도균 교수는 국제 질서와 국내 정치 환경의 변화, 새로운 세대의 출현으로 민간 통일운동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제단에 “진정한 의미의 남북관계 화해를 위한 노력, 평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 남북간 호혜적이며 상호 긍정적인 지속가능한 협력 체계”등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앞날을 논하다 (3)
사제단과 교회 쇄신_ 박기호 신부(산위의마을)
사제단 활동은 예수의 유업을 잇는 ‘구마 행위’이자 육화의 재현
교회 쇄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 나가야...교육 사업 필요
마지막으로 박기호 신부는 사제단 활동과 교회 쇄신에 관해 성찰했다.
▲ 발표에 나선 산위의마을의 박기호 신부. ⓒ정현진 기자
“그리스도의 사제란 예수의 삶과 죽음의 고유성을 자신에게서 동시성으로 드러내고 실현하는 자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우리 시대에서도 계승되어야 할 유업이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우리 시대를 구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탐욕의 악령을 추방해 창조적 삶으로 복귀시키는 운동이다. 사제단의 활동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마귀를 쫒아내는 구마 행위다.”
우선 박 신부는 사제단 활동을 예수의 유업이자 한국 사회에서의 ‘구마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사제단 활동의 은사는 “거리와 광장, 아픔의 현장에서 육화의 신비를 재현한 것이며, 분명한 목표 세계를 갖고 일관적인 투쟁을 지속해온 것, 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 왜곡된 계급 의식을 넘어 선 소명 의식과 순수성의 동기, 그리고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평가했다.
이어 박 신부는 이러한 사제단의 활동이 한국 가톨릭교회를 쇄신했는가라고 묻고, “교회 쇄신을 목표로 설정된 활동이 아니었기에 다소의 한계는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교의적 지형의 확대, 각 교구 정평위 활동 활성화 , 교회 보수화 견제 환경 마련” 등의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박 신부는 교회의 보수화 흐름, 정치적 신심주의 보수단체의 출현을 차단해 온 것은 쇄신 이상의 기능이었다고 지적했다.
박기호 신부는 사제단의 긍정적 역할 뿐만 아니라 교회 쇄신 차원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짚었다. 그는 “고단한 광야의 예언자로서 가볍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단의 역량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이 분명히 있었다”면서 성찰의 질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신부는 조직화 차원에서 본당의 정의구현 사도직의 준거를 마련하거나 사회문제를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보게 하는 신학, 영성, 성화 교육 실현, 평신도 활동가의 양성, 국제적 연대와 교류, 합법적이고 민주적이며 충분한 논의 구조 마련, 사제단 활동 사제들의 품성과 태도에 대한 고민 등을 추후 사제단 활성화를 위한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박기호 신부는 무엇보다 사제단이 교육사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활동에 참여하는 사제들의 양성과 일반 신자들을 위한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사회정의 실현 운동을 영성의 실천 운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앙과 신심을 사회화시키는 교육이라고 설명하면서 “정의구현을 위한 사제의 행동은 분노나 공명심이 아니라 영성의 행동화라는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도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갈리고 교회도 두 진영의 깃발 아래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 시대다. 루치펠 진영의 악령을 추방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확실한 영적 투쟁이 시작됐다.”
박 신부는 앞으로 사제단의 과제는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국민의 이기심과 무지에 대적하는 것”이 될 것이라면서, “예수의 지상 소명은 악령을 추방하고 상처받은 자를 치유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소명은 시대의 악령을 추방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