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용의 내 인생의 책
이건용 |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장
▲ 두시언해·두시언해비주 - 내 음악세계 바탕 된 ‘두보의 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고 기억된다. 국어교과서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승상애 사당을 어대가 차자리오.”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지는 두보의 시 ‘촉상(蜀相)’을 우리 선조들이 번역한 언해였다. 완전 암호였지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해독이 되면 될수록 감동과 재미를 주었다. <두시언해>의 장에 여러 편이 있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좋아한 것이 ‘촉상’이었던 것은 내가 삼국지를 탐독했고 그 작중인물인 제갈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촉상, 즉 촉나라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두보 역시 고초가 많은 삶을 살았다. 그는 그래서 제갈량을 남달리 흠모했다고 한다. 제갈량에 대한 시를 열세 편이나 남겼다.
언해의 번역은 다소 직역에 치우친 것이었으나 나에게는 그 뻣뻣함이 오히려 옛사람들의 미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사실 그동안 서양음악을 배우느라 서양문화밖에 모르던 나는 이 때 처음으로 우리 전통의 미감각과 동양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난 셈이었다.
두보의 시가 좋아진 나는 더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책방을 뒤진 끝에 <두시언해비주>라는 책을 찾았다. 이병주 선생이 쓴 저서로 언해된 두시 전편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두시의 원문, 두보에 대한 소개, 당시(唐詩)의 작법 등이 소상히 언급되어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말하자면 국문학 분야의 전문서적이었는데 다른 책을 구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우리나라 옛글, 한시의 세계, 당시(唐詩)의 이해를 합해 놓은 교양서였다.
이 책들, <두시언해>와 <두시언해비주>가 발단이 되어 나는 동양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나의 음악작품 전반에 그러한 영향이 반영되어 오늘 나의 음악세계를 만드는 한 바탕이 되었다. 지금도 1970년대 초에 산 <두시언해비주>를 40년 넘어 간직하고 있다. (2014년 6월 22일 <경향신문>)
▲ 삼국지 | 나관중 - 내 문장 감각의 발원지
TV도 없고 영화도 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라디오조차 많지 않았다. 스스로 놀아야 했고 알아서 재미를 찾아야 했다. 책은 제일 좋은 방편이었다.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이 소설, 특히 <삼국지>였다.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1960년 초반이다.
여러 번 읽었다. 나중에는 그 긴 소설의 어느 부분을 펼쳐도 전후좌우의 얘기를 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의 형도 <삼국지> 열독자였는데 그와는 장난삼아 삼국지에 나오는 고풍스러운 말투로 대화하기도 했다. “어찌 소리(小利)를 탐하여 대의(大義)를 그릇치난다!” 하는 식이었다.
나는 삼고초려편을 가장 좋아했다. 매우 건조하고 대범하게 진행되던 스토리가 이 부분에 이르면 자세하게 진행되면서 많은 에피소드와 인용시를 곁들인다. 그러면서 착한 영웅이 신비스러운 선비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다. 이 장면을 위하여 유가와 도가, 그리고 중국의 다양한 문학적 전통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 나이를 먹고서이다.
처음 읽은 판본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후에는 나관중의 <연의(演義)>를 모종강이 가필하고 최영해가 번역한 것을 좋아했는데 아마 처음 읽은 것도 같은 것이리라 짐작된다. 이 책은 마치 역사책처럼 건조하다. 조조를 깎아내리고 유비를 일방적으로 편들지만 그조차 역사책처럼 써나간다. 작가의 감정이 아니라 역사가의 시각처럼 서술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문장 감각이 이 소설에서 비롯되었다고 느낀다. 감정을 아낀다든가, 짧고 건조한 문장을 좋아한다든가, 리듬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다. 더 중요한 것은 목사의 집안에서 슈베르트를 좋아하면서 자란 내가 동양의 예술과 그 감각을 섭취할 수 있었던 최초의 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읽었던 책은 없지만 나는 아직도 정음사에서 펴낸 1974년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 (2014년 6월 24일 <경향신문>)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도스토예프스키 - ‘알료샤’에게서 나를 보았다
전회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책은 나에게 TV요, 영화요, 프로야구였다. 다른 재밋거리가 없던 시절, 소설은 나에게 문학 이상이었다. 대하소설을 좋아했다. 붙들고 며칠을 밤새 읽었다. 다 읽고 나면 내가 소설의 세계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러시아 작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가 그린 인물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아니, 그의 인물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내가 그들을 통해 성장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참으로 심오한 소설이었다. 특히 그 길고 긴 재판과정의 언급들과 대심판관의 일화를 10대의 내가 어떻게 읽어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그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여러 번 독파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내 인생에 중요한 하나의 모델을 얻었다.
흔히 이 소설의 주인공을 언급할 때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둘째 아들 이반을 언급한다. 예컨대 오래전의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분명히 서문에서 셋째 아들 알료샤가 주인공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 나와 동일시하면서 읽은 등장인물이 바로 그였다. 본능으로 움직이는 첫째 아들과 이성으로 움직이는 둘째 아들은 둘 다 서로를 미워한다. 또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둘 다 존속살인의 잠재적 범인이 된다. 반면 알료샤는 직관으로 움직인다. 그는 아버지와 애정을 나누는 한편 등장인물들 간의 여러 갈등을 풀어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했던 청춘 시절,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답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때 알료샤가 보여주는 ‘선한 직관’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밋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삶의 가르침을 준 ‘전기’ 같은 책이었다. (2014년 6월 25일 <경향신문>)
그밖에...
▲ 슈베르트 100곡집 | 슈베르트 - 슈베르트와 내 청춘은 한몸
▲ 서울 1964년 겨울 | 김승옥 - 김승옥을 읽고 소설을 쓰다
김선정의 내 인생의 책
김선정 | 큐레이터
▲ 무지한 스승 | 자크 랑시에르 - 진정한 교육은 ‘평등’에서 출발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한글을 배우는 일이 어찌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기역, 니은을 못 외워 엄마에게 혼나는 내 모습을 보던 동생이 한글을 먼저 읽게 되고, 그럴수록 배움이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왜 그렇게 한글을 깨치기가 어려웠는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차근차근 배우기보다 서두름이 앞섰던 게 그 이유인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해 보니 대부분의 반 친구들은 한글을 다 깨친 상태였고 수업시간에 한글을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런 환경이 내게 조급함을 가져왔고 나는 배우려는 의지를 쉽게 상실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을 때 다른 방법으로 가르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런 내게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은 배우고 가르치기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과 사고의 전환을 제시했다.
“1818년에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로 시작되는 이 책은 출발점으로서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하는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다수가 프랑스어를 몰랐다.
그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네덜란드어 대역판을 학생들에게 건네주었고 그 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게 한 결과, 학생들은 거의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는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가르침의 행위 없이 배움에 대한 학생의 자율적인 의지로 이루어진 결과이며 스승·학생의 종속관계, 즉 가르치는 자가 가지는 우위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적 능력을 가진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교육 과정에서의 ‘지적 해방’과 ‘보편적 가르침’을 통해 랑시에르는 평등, 의지, 그리고 정치에 대한 사유를 제시한다. (2014년 6월 19일 <경향신문>)
▲ 느림 | 밀란 쿤데라 - 전시 기획에 영감 준 소설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 대한 한 서평에 이런 우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어느 날 황제가 게 하나를 그려달라고 했다. 추앙추는 열두 명의 시종과 집 한 채, 그리고 5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5년이 흘렀으나 그는 아직 그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추앙추는 5년을 더 달라고 했고, 황제는 이를 수락했다. 10년이 거의 지날 무렵 추앙추는 붓을 들어 먹물에 찍더니 한순간에, 단 하나의 선으로, 이제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완벽한 게를 그렸다.” 이는 현대를 살며 우리가 간과했던 시간의 관념을 이야기한다. 시간의 확장과 축소 사이, 미묘한 속도의 경계에 놓인 추앙추의 시간은 기다림의 ‘순간’일 수도, 혹은 기다리는 ‘시간’일 수도 있다.
전시는 시각적 글쓰기이다. 뭔지 알 수 없는, 의미를 읽기 힘든 작품이 전시장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작품들은 책에 쓰인 단어들처럼 어떤 의미를 생산한다. 그리고 단어들이 연결되어 문장을 만들어 나가듯 작품들도 각각의 의미를 연결시켜 전시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와는 달리 현대미술의 발언은 고유한 언어와 어법으로 지나치게 개념적이거나 소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를 통한 발언은 직접적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은유적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과 서평이 단초를 제공한 ‘느림’전(1998, 2000년)은 시각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하고자 했던 필자의 첫 번째 시도이다.
1990년대 중후반의 급속한 개발 상황을 속도와 연결시켜 현대사회의 가속도와 풍경의 변화, 그리고 사라져버린 장소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를 전시로 풀어냈다. (2014년 6월 17일 <경향신문>)
▲ 에코토피아 뉴스 | 윌리엄 모리스 -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학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맞춰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몇 권의 이야기책을 제외하고는 15세가 될 때까지 독서를 할 필요도 없다. 지도자, 정부, 법, 사형제도가 없고, 투쟁과 혼란의 시기에 주로 관심이 확대되는 역사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무관심한 편이다. 모든 땅과 건축물은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되거나 사회적인 용도로 쓰인다. 국회의사당은 거름창고로, 대영박물관은 개인의 주거지로 변했다.
강제적인 노동이나 교육은 물론 소유도 없고, 의회도 법원도 국가도 없는 유토피아. 바로 윌리엄 모리스가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그려낸 미래의 모습이다. 19세기에 영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사회주의자동맹의 기관지 ‘코먼웰’에 연재된 이 소설은 꿈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의 사상을 정리한 기록이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와 예술로 승화된 노동을 꿈꾼 저자는 자본주의가 사라지고 자유와 자치가 보장되는 친환경적인 신세계를 제시한다.
여타 작가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공동체와 노동의 문제를 그려냈지만 박물관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점에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궤를 같이한다. “박물관은 폐쇄되고 역사적 기념비는 파괴되었으며 포드 기원 150년 이전에 출판된 책들은 모조리 탄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지.” <멋진 신세계>에 묘사된 이런 모습처럼 미래에는 정말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필요없게 될까? 박물관의 기능이 사라진 미래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일 현재의 가치, 정치·경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미래는 지금과 다른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2014년, 우리도 어떤 미래를 만들려고 하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2014년 6월 15일 <경향신문>)
그밖에...
▲ 고향 | 김범 - 작업 대상 된 ‘책이라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