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과 가톨릭신앙의 통합, 무위당 선생님을 그리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1]
황경훈 | editor@catholicnews.co.kr
(출처- 2014년 5월 21일 / 6월 5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장일순 선생님이 귀천하신지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니 세월은 꿈결 같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내가 장일순 선생님의 기일에 무슨 글을 쓴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의 생각과 말씀이 이 시대에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기에, 더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알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서 감히 용기를 내본다.
선생님과 삶과 사상을 짧은 지면에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장일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우선 여러 후배 사상가, 학자, 활동가들의 생각을 빌어 선생님의 사상과 종교관을 소개하고, 특히 평신도 영성을 중심으로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장일순 선생님에 대해 내 생각을 전해 볼 요량이다. -필자
▲ 무위당 잘일순 선생, 자택에서 (사진출처/무위당 사람들)
무위당 장일순은 이런 분이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 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 ‘걷는 동학’ 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 명이나 모였다는 사람....”(최성현, <좁쌀 한알>)
호명된 이들은 현재 여러 방면에서 내공 있는 분들로 잘 알려졌는데, 이분들이 장일순 선생을 아버지, 스승, 맏형으로 모신다니 글을 읽기 전부터 주눅이 들것만 같다. 하지만 정작 무위당은 앞에 나서는 일이 없이 늘 후배들을 앞세웠기에, 오히려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가톨릭의 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그럼에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무위당 장일순을 알아가면 갈수록, 깊이 파면 팔수록 샘솟는 샘물과 같이 더 깊은 수원이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는 그 깊고 넓은 수원의 물만 잠깐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장일순을 따랐던 김지하는 한 대담에서 장일순의 사상적 맥락을 전체적으로 조명해 달라는 청을 받고, “개인을 영웅으로 역사에 부각시키는 시각으로 장일순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한다. 백범이나 여운형과 같은 방식으로 장일순을 연구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민중 속에 살아있는 운동가이며, 또한 그를 둘러싼 운동역량 등과 또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해야하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장일순이라는 개인의 면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도덕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장일순은) 유학적인 수양으로 몸을 다지신 분이고, 마치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도덕을 실현한 분이죠... 그래서 유학과의 관계를 밝혀야 그분이 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쓰라린 일들이 생겨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도덕을 체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가톨릭 정신을 실현하신 분이죠. 세 번째가 해월 정신이 드러난 시기입니다... 이처럼 어떤 도덕적인 정신사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또 철저히 운동정치가입니다.”(김지하,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김지하는 장일순이 해월을 통해서 태생적인 유학을 넘어서게 되었다면서, 가톨릭도 예수의 가톨릭은 좋아하면서도 ‘바리사이식 가톨릭’은 넘어섰으며, 따라서 단편적인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유영모나 함석헌처럼 장일순을 종교를 통합해 사상을 펼친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 장일순 선생의 난 (사진출처/무위당 사람들)
김지하는 장일순이 결국 도달한 것이 바로 풍류도라면서, ‘풍류 속에 숨겨진 생명’이라는 말이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말이라고 보았다. 곧 장일순은 자신의 사회, 종교, 교육, 사상의 도를 난초를 치는 예술을 통해 열어 보였다. 김지하는 장일순이 만물을 다 껴안고 살린다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는 유불선과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해월을 통해 가장 잘 이해했으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고 전했다.
“해월사상은 장일순 선생님이 가장 잘 이해하고 드러내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네같이 덕 없는 중생들은 해월사상을 흉내 내는 것도 힘들어요. 또한 그분은 해월의 정신대로 사셨지요. 그분의 해월사상은 해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까지를 모두 흡수하신 결과로 나타났지요.”
장일순이 삶으로 보여주고 살아낸 해월사상을 ‘흉내내는 것도 힘들다’고 한 김지하의 고백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한국 사회과학계의 대표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리영희도 장일순과 가까운 관계였는데 무위당을 두 가지 면에서 자신과 차별화한다.
“나는 무위당처럼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아울러서 사는 분의 사상이나 자세에는 어림도 없죠... 무위당은 종합적이랄까, 총괄적이랄까, 잡다하게 많은 것을 이렇게 하나의 보자기로 싸서 덮고 거기서 융화해 버린단 말이에요... 둘째는 역시 나는 감히 못 따를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인데,... 그 삶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한 예로 그 집 변소를 보면, 남들은 전부 개조해서 세상을 편리하게만 살아가려고 고치는데, 그냥 막 풍덩풍덩 소리가 나고 튀어 오르고 야단났어요... 부엌도 그렇지, 마당 그렇지, 우물 그렇지,... 철저하면서도 그렇다고 ‘난 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거 하는 거야’하고 이론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실제 생활인으로 하신단 말이에요. 그것이 놀라워요. 철저하면서도 조금도 철저하지 않은, 그저 일상생활이 되어 버리는 이런 인간의 크기 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그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단 말이에요.”(리영희,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리영희는 장일순이 농민, 사회문제, 문화방송과의 문제, 교구와의 관계, 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에 관여하면서 살던 때에도 그 살던 집의 모습과 사는 모양이 자연 그 자체였기에, 그의 생명사상이 어느 시기에 이렇게 전환된 것이라기보다는 장일순이라는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라고 본다고 했다.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 영전에 이런 글을 남긴다.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지난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자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은 사람에겐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셨습니다.”
선생님 우리 곁을 떠나신지 20년이 지난 오늘, 선생님 빈자리가 점점 더 커지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예수는 ‘보이는’ 하느님” - 장일순 선생의 종교관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2]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암이 들어 병원에서 수술을 시도했다가 그냥 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주 목사는 그대로 황천길로 들게 하기에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해서인지 ‘욕심’을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 작은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시작한 것이 “노자 이야기”라는 제목의 <도덕경> 풀이였다.
▲ <노자 이야기> 장일순, 이아무개 옮김, 2003
내가 무위당 선생을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서였고, 내게 이 시간은 마치 한 겨울에 잠시 내려 쪼이는 한 줄기 따뜻한 빛이었다. 당시 나는 필리핀에서 그래도 ‘진보적인’ 서양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종교와 문화에 대한 생각부터가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새로움도 있었지만 답답함이 더 컸다.
그 때 아침마다 성서를 옆에 놓고 한 시간씩 두런두런 무위당이 들려주는 <도덕경>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신앙을 등지거나 학문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위당의 종교 이해 속에서 나는 신앙이 바다 같은 끝없는 자유라는 것을 확신했고,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0여 년 동안 승려로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베스트셀러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은 무위당의 종교가 매우 다원적이면서도 각 종교가 그 안에서 갈등 아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유가(儒家)인가 하면 불가(佛家)요, 불가인가 하면 노장(老莊)이며, 노장인가 하면 또 야소(耶蘇)의 참얼을 온몸으로 받아 실천하여 온 독가(督家)였던 선생은, 무엇보다도 진인(眞人)이었다. 속류 과학주의와 속류 유물론과 유사 종교적이고 혹세무민적이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추상적 형이상학만이 어지럽게 춤추는 판에서 대중성, 민중성, 소박성, 일상성 속에 들어 있는 거룩함을 되찾아 내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한 몸뚱어리의 두 이름으로 더불어 함께 영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길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순평(順平)한 입말로 남겨 준 선생이시다.”(김성동,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 선생의 다원적이면서도 ‘유기적’ 종교관은 유불선과 그리스도교를 통합한 것이지만,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사상, 그 가운데서도 향아설위(向我設位)와 함께 이천식천(以天食天)을 강조하는 데서 그의 생명사상은 해월에게 크게 기대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유불선과 그리스도교가 서로 잘 소통하고 융섭하여 마치 몸에 잘 맞아 편안한 옷과 같은 그런 경지를 서양 신학자들은 물론이요, 한국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성직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를 ‘종교혼합’이라고 곡해한다면 무위당의 깊은 한국적 신앙과 토착적 영성의 가능성은 제대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무위당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최시형의 이천식천을 이렇게 푼다.
“해월 선생 말씀에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씀이 있어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이에요. 동학에서 일컫되 인내천(人乃天)이라, 그리고 사람만이 하늘이 아니라 곡식 하나도 한울님이다, 돌 하나도,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다, 이 말이에요.”(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장일순 ⓒ무위당 사람들
무위당은 불교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매우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 가톨릭 농민회 지도신부였던 정호경은 무위당에게 팔만대장경의 뜻을 두 구절로 줄였다는 ‘불취외상 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란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받고는 고마운 마음에 스스로 장일순의 마음이 되어 이를 헤아려 본다. 여기서도 장일순의 종교간 융섭과 일치 사상이 정호경의 종교사상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가톨릭 신부가 불교 경전의 알맹이를 화두로 삼는다! 거 참 좋구나! 그래, 종교의 벽을 넘나들며 산다는 것, 그게 하느님의 뜻일 테고, 예수 석가의 길이니까, 마땅하고 옳은 일이야! 하지만 거기서 그냥 머물러서야 쓰겠는가! 끝도 없이 나아가야지!... 애당초 한몸이었으니까! 이념의 벽도 종교의 벽도 허물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벽도 허물고 하나로 통일될 때, 그 때 거기서 참 생명이신 하느님도, 너도, 나도 제대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정 신부, 아우님(생전의 선생은 술자리에서 저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소이까? 하하하.”(최성현, <좁쌀 한알>)
정호경을 통한 장일순의 이러한 종교사상이 조금도 꾸밈이 있다거나 과장되지 않은 것임이 다음의 한 일화를 통해서 밝혀진다. 지인들과 지학순 주교, 장일순 등이 치악산에 갔었는데,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렀다. 장일순과 지학순은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을 보고 한 일행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성현, <좁쌀 한알>)
시대적인 이유도 있었고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무위당은 글을 남기지 않았고, 여러 강의에서 비교적 자주 비유적으로 언급은 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론이나 신론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불선과 그리스도교를 ‘융섭’한 종교가 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다원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위대한 한 종교의 성인으로, 또 ‘보이는’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맑스가 착취와 피착취만으로 얘기할 때 하느님은 보이지도 이해될 턱도 없다고 비판하면서 ‘안 보이는’ 하느님의 중요성을 ‘보이는’ 하느님인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공(空)이라든가 기(氣)라든가 부처님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하는 이 사실은 눈으로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는 뵈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아버지는 안 뵈는 하느님이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그 모범과 자연의 이치대로 가장 잘 살아간 사람은 -여기 그리스도교인이 많으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여기 이 자리에도 예수님이 많아.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너희들은 오라질 놈들아 백날 가도 아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그는 예수 탄생과 관련한 강연에서 예수가 구유에서 난 것은 짐승의 먹이로 온 것이며, 따라서 인간 세상만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모두를 해결하러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무위당이 하고 싶은 말은 구유에 온 예수를 통해서, 우주의 모든 티끌도 하느님이라는 절대와 하나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일 걱정은 내일하라’고 한 것도 상대적인 시간에 매여 살지 말고 절대적인 시간인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생명은 유기물뿐 아니라 무기물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이다. 그는 “생명은 하나이고 절대이고 그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고,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이요 그분 자체이심을 알려주십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장일순의 하느님은 티끌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과 동일시되며 이는 그가 표현하는 ‘생명’과 동의어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