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저항했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얼마 전 발생한 ‘백화점 모녀 사건’은 최근 폭발하는 ‘갑’ 관련 뉴스 중 하나가 아니다. 나는 매일 진화하는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았다. 아직 시비가 가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저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처음 나는 자신을 ‘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갑이라는 정체성(?)도 웃기지만 VIP라고 주장하는 모녀처럼 물건을 많이 사면 ‘갑’이 되는가. 그리고 ‘갑’은 아무나 무릎 꿇리는 이들인가. 마치 망국 직전의 조선 말기를 연상케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갑이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당시 인구 구성은 세금을 안 내는 양반이 70%, 세금을 내는 평민이 30%였다. 양반 족보가 매매되는 등 신분제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흥미’로웠던 점은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트위터로 인한 후폭풍이다. 그는 “백화점 알바생 3명이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며 “하루 일당 못 받을 각오로 당당히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 가난할수록 비굴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는 의견을 올렸다. 물론 그의 선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제까지는 ‘갑질’에 대한 비난만 있었지, 피해자의 대응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겨레는 “저항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책임이며 당시 상황을 기록, 고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며 ‘패기 없음’을 지적하기보다 함께 있었는지 돌아볼 일”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의견 모두, 당사자(피해 아르바이트생)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비슷한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몇 년 전 이사 중에 ‘가보’ 같은 책상을 잃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시간이 없다며 책상을 해체하지 않고 옮기다가 2층에서 떨어뜨려 박살을 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변상할 테니, 절대로 회사에 알리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회사는 보험에 가입했다고 선전했지만 그들은 “모르시는 말씀”이라며 돈을 내겠다고 우겼다. 변상하면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하는 셈이다. 나는 차마 그들의 일당을 ‘뺏을 수 없어’ 포기했다. 이 경우 이삿짐 회사 직원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 과실이므로 저항할 자격조차 없는가.
다시 반전. 며칠 전 우연히 공공도서관 휴게실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조기숙 교수와 한겨레를 모두 비판했다. 그들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요지는 1)알바들이 저항 잘한 거 아냐? 저항이 뭔데? 저항했다가 회사에 찍히는 거? 그게 저항이냐? 손해지! 2)참은 걔들이 잘한 거지. 당하는 장면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게 저항이지. 합의금이라도 받아야지. 3)저항한답시고 여자들에게 뭐라고 해봐라. 피해자가 가해자 된다니까. 4)지들은 금 수저 물고 태어나서, 없는 사람한테 “저항하라”는 인간들이 갑보다 더 재수 없어.
저항이란 무엇일까. 이기는 것인가. 인간다운 것인가. 정의인가? 단도직입적으로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 하므로 이익보다 대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윤리적, 사법적, 문화적 차원에서 저항의 개념은 모두 다르다. 이 불일치 때문에 피해자들은 저항하면 할수록 2차, 3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약자들이 저항할 줄 몰라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피해가 있기 때문이다.
저항해서 자존감이 회복되거나 실질적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저항 과정의 사소한 문제가 가해의 본질보다 더 문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갑질’은 하지 않지만 ‘있는 자’들은 이 억울함을 모른다. 없는 이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된다. 사회불안 조장세력이 되거나 허수아비 취급을 받으면서 누가 시켰느냐며 배후를 조사받는다.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사라지고 양비론에 사생활까지 파헤쳐진다. 나는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상담하면서 이런 경우를 무수히 보았다.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비난 받는다. 부정의는 끝이 없다. 유명 진보 인사나 ‘강남 좌파’가 저항하면 명예든 실질적 힘이든 얻을 확률이 있지만, 민초가 저항하면 박수보다 뭉개진 억장(臆腸, 가슴과 창자)에 다시 억장(億丈)이 덮친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누구의 시각인가? 그들은 저항했다.
(출처-2015년 1월 15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