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노신사’님께
김경 | 칼럼니스트
라종일 선생님. 먼저 단 한번의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 이렇듯 편지를 쓰게 된 경유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는 화제의 신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와 상처, 분노, 좌절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30대의 젊은 여성 칼럼니스트 김현진이 자신이 발견한 구원의 노신사와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낸 책이지요. 그 노신사는 서울대를 나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주영대사와 주일대사, 대학총장,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거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처음엔 뭔가 살짝 아니꼽더군요. 제가 아는 김현진은 주류라든가 엘리트, 기득권들의 논리를 태연하게(심지어 유머를 섞어 매우 희극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젊고 도발적인 여성 작가인데, 그런 그녀가 책이 지독히 안 팔리는 ‘루저의 궁지’에 몰려 엘리트 중의 엘리트에게 ‘구원의 SOS’를 청한 것인가 싶어서 다소 굴욕적으로 느껴졌달까요? 읽어보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굴욕에 대한 그러한 준비된 저항감이 슬그머니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일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대부분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지낸’ 이들이 만들어 낸 무섭고도 우스운 일. “감옥은 권력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이 함께 사는 모든 곳에 스스로 만든 감옥이, 그리고 그 안에 갇혀 무서워하고 무섭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현진 작가에게 보내는 선생님의 답장을 읽으며 시종일관 저 자신의 감옥을 느꼈습니다. 제 스스로 만든 우습고도 가련한 감옥 말입니다. 특히나 ‘일베’와 ‘서북청년단’에 대한 라종일 교수님의 의견을 읽을 땐 뼈아픈 반성이 느닷없이 몰려와 제 심장을 강타하는 느낌이었지요.
‘종북’이든 ‘일베’든 ‘일정한 명칭의 이름표’를 붙여 편리하게 분류하지 말고, 한 개인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던가요? 그 이야기를 읽고 일류가 됐건 이류가 됐건, 설사 삼류라 하더라도 글을 쓰는 자로서 나 자신이 얼마나 판에 박힌 단층적인 의견만을 추구하며 안일하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니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한편 선생님께서 쓰신 앙드레 말로 이야기를 통해서 사소하지만 큰 위안과 용기도 얻었습니다. 작가로서 매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골 대통령 집권 시절에 문화부 장관까지 지낸 앙드레 말로의 업적이라는 것이 선생님이 보시기에 실상은 쓴웃음을 짓게 하는 허풍 혹은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일화 말입니다. “성공적인 사기꾼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자기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작가보다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진실된(‘스스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하게 되더군요.
반면 감히 반발하고 싶었던 내용도 있었답니다. 무엇보다 먼저 묻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인가요? 선생님 말씀처럼 사형 제도가 없어졌다거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것만으로 이 세상을 진정 그렇게 낙관해도 좋은 것일까요? ‘혁명’과 ‘그 이후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그토록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의 의견이라 저로서는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무자식 상팔자’가 아니라 ‘아이가 구원’이었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며 출산을 독려하던 부분도 그랬지요. 뭐랄까? 제게는 저마다 다른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화의 오류’처럼 읽혔습니다. 물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요. 지난 밤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이란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학교에 신고 갈 운동화가 단 한 켤레밖에 없는 가난한 집안의 두 아이가 보여주는 눈물과 잔꾀가 얼마나 예쁜지, 비참한 현실을 느닷없이 ‘천국’으로 만드는 ‘구원’으로서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으니까요. 혹시 안 보셨다면 꼭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슬프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천사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볼품없이 처량해진 루저로 만드는 것일까? 패배 의식에 젖은 채 나날이 시들어가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왜 못나게 취직할 생각만 하는 것이냐? 남에게 직장을 만들어 줄 생각은 못하는가?” 격하게 공감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여전히 사람으로서 추구하는 가치의 문제보다 경제와 분배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 같다. (…)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그 마지막 추신에서 저처럼 아쉬움이나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가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공개적인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출처-2015년 1월 22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