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돌아오고 있다, 농담이 아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독일에서는 ‘페기다’(PEGIDA·서구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이란 뜻)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월12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베르기다’(BAERGIDA) 주도의 반이슬람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속 시위자는 "우리는 나치가 아니다. 우리는 독일 시민들이다"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AP/뉴시스
정의길의 세계만사 ⑤
여러 요소들이 나치 탄생 전 유럽 상황과 닮은꼴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유럽 극우주의의 ‘결과’
각국 극우정당들 대약진…어느새 집권 넘봐
올봄 일부 국가 선거가 시금석 될 듯
유럽은 ‘관용’과 ‘다문화주의’ 지켜낼 수 있을까
나치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극우정당이 조금 세력을 늘리는 것에 대한 정치적 수사’라고 반응합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을 보면 그렇게 한가하게 반응할 상황이 아닙니다. 극우정당의 집권이 가시화된 상황입니다.
극우정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그 정당이 나치와 같다고 분류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재 유럽의 극우정당의 이념이 나치보다는 훨씬 순화·순치됐고, 그 스펙트럼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유럽의 가치였던 다문화주의와 관용주의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나치와 현재의 유럽 극우정당은 성격을 같이합니다. 나치나 현재 유럽 극우정당들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 나치 탄생 전야와 유사=나치를 탄생시켰던 상황, 그리고 현재 유럽 극우정당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상황이 비슷합니다. 나치를 키웠던 대공황 뒤 독일의 사회경제 상황과 현재 유럽의 경제상황이 유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층의 좌절과 무기력이 비슷합니다. 스페인 등 일부 국가의 젊은층 실업률은 50%를 넘습니다. 유럽연합의 젊은층(15~24살) 평균 실업률은 23.5%로, 전체 평균 실업률 10.5%의 두 배가 넘습니다. 젊은층이 일자리를 구해도, 42%는 일시계약직입니다. 이는 성인에 비해서 4배나 높습니다. 또 32%는 파트타임직입니다. 이 역시 성인의 두 배 입니다. 젊은층의 4분의 3이 취업을 해도 불완전 고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면 현재의 기성세대 정도로 취업 사정이 나아질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경기가 풀리면 조금 나아질 수 있겠지만, 현재의 취업 구도가 기본적으로 유지된다고 봐야 합니다.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현재에도 아무런 소속감 없이 부유하는 젊은이들은 현재 유럽의 기성 정치체제를 허무는 동력입니다. 투표율은 나날이 떨어지고, 기존 정당의 당원 가입율도 급감합니다. 기존 정치체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럽의 극우정당이나 극우세력들이 대약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치 집권의 동력이 된 유대인 문제와 비슷한 것이 현재 유럽을 휩쓸고 있습니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배척입니다. 나치가 당시 독일이 안고 있던 모든 문제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희생양 삼은 것처럼, 유럽 극우정당들은 현재 유럽 문제의 대부분을 무슬림들에게 돌리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프랑스 파리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기화로 유럽 각국의 극우정당들은 반이슬람·반다문화주의 선동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 “2015년은 유럽의 정치 지진의 해”=이 때문에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싱크탱크인 이아이유(EIU)는 최근 조사를 통해서 2015년은 유럽의 정치적 지진이 축적되는 해라고 단정했습니다. 부상하는 극우정당들은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있고, 기성 주류 정당들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 극우정당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해야만 하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예견했습니다. <비비시>도 20일 ‘민주주의의 날’이라는 특집방송을 통해서 유럽이 처한 기존 정치체제의 위기를 다뤘습니다. 실제로 유럽 극우정당들은 샤를리 테러 사건을 전후로 주요 3개국에서 지지율 1위 정당으로 떠올랐습니다.
지난 11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반이슬람 기치를 내건 네덜란드의 자유당은 당장 선거가 치러지면 1당으로 올라설 것이란 결과를 받았습니다. 의회 전체 150석 중 자유당이 31석을 얻어 1위로 부상할 것으로 나타났는데, 자유당의 현재 의석보다 두 배나 많은 것입니다. 자유당은 선호정당 조사에서도 21%의 지지를 얻어 1위를 기록했습니다. 현재 79석의 제1당인 자유민주당의 의석은 당장 선거가 새로 치러지면 28석으로 쪼그라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헤이르트 빌더스 자유당 대표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 뒤 “서방은 이슬람과 전쟁중”이라고 말해 나라 안팎에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현재 인종차별을 선동한 혐의로 피소된 상태입니다.
(그림)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
유럽 극우정당의 대표 격인 프랑스의 국민전선도 지난해부터 창당 이래 최고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전선은 지난해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25%의 득표율로 프랑스 정당 중 1위를 차지한 이후 지지율이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현재 지지율은 28%로 여전히 1위입니다. 마린 르펜 대표도 현재 대선이 치러지면 결선투표에 진출할 수 있으며, 결선투표 경쟁자가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이면 그를 꺾고 당선될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무렵인 지난 6~8일 실시된 프랑스여론연구소(Ifop) 여론조사에서 르펜은 지지율 31%로 정치가들 중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국민전선은 테러 이후 하루 100~150명이 새로 입당해 3000여명의 신입당원이 모집됐다고 밝혔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극우정당인 자유당도 지지율 27%로 1위 정당이 됐습니다. 자유당은 1999년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우파 국민당을 제치고 1위를 했는데, 자신들과의 연정 구성에 동의해준 국민당에 총리 자리를 양보해, 절반의 집권에 그쳤습니다. 2000~2005년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자유당의 약진으로 현재 유럽 국가 가운데 극우 정당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됩니다.
■ 영국과 그리스가 시금석=오는 5월 총선을 치르는 영국에서도 기존 정치시스템인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제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미 15%의 지지율을 보이는 독립당이 보수당과 노동당의 기존 표들을 심각하게 잠식할 것으로 보입니다. 독립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할 가능성까지 제기되나, 그보다는 새로 구성될 정부가 극도의 불안한 정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장 그리스는 전혀 다른 성격의 정부가 들어설 전망입니다. 극우정당은 아니나 기성 정치질서와 기성 정당에 대한 반대 기치를 내걸고 현재 집권이 유력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등장입니다. 시리자의 집권은 유럽 정치질서에서 불안정의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조건의 변경을 주장하는 시리자의 집권은 유로존과 유럽연합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하고,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정치격변으로 이어질 가능성 큽니다.
유럽 다른 나라에서 기성 정당 질서를 거부하는 정당을 대부분 극우정당입니다. 현재 덴마크, 핀란드, 스페인,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모두 올해 각종 선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샤를리 테러 사건은 지난해부터 지지율을 높이는 유럽의 극우정당들의 약진에 기름을 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방과 이슬람권의 대립과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유럽의 대중들은 반무슬림·반이민·반다문화주의로 치달을 가능성이 큽니다.
■ ‘수정의 밤’과 샤를리 테러 사건=1938년 11월7일 아침 프랑스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헤어셸 그린츠판이라는 17살 독일 태생 폴란드계 유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린츠판은 3등 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에게 안내되자마자, 외투에서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권총을 라트에게 발사해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체포된 그린츠판은 부모에게 보내는 우편카드를 갖고 있었습니다. “신이 나를 용서해주시길… 전 세계가 내 항의를 듣도록 나는 항의해야 한다. 나는 이걸 할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우편카드는 그의 범행동기를 설명해줬습니다. 독일에 살고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 부모는 그의 범행 전에 독일에서 추방됐습니다. 당시 나치 정권이 외국인 거주허가 갱신을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외국 출신 유대인들에게는 불허했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독일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독일에서 추방된 폴란드계 유대인들은 국경 지역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틀 뒤 라트가 숨지자, 독일 전역에서는 유대인 상점과 집들이에 대해 방화와 파괴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틀 동안 벌어진 이 폭력 사태는 ‘크리스탈 나흐트’(수정의 밤)라고 불립니다. 유대인 상점에서 깨져나간 유리들이 거리에서 수정처럼 빛났기 때문이죠. 나치의 공식발표로만 최소한 91명이 숨진 수정의 밤은 유대인 탄압이 물리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80여년 전의 암살 사건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테러에 시사점을 줍니다. 라트의 암살은 독일 등지의 유대인 박해를 비등점으로 끌어올리는 명분과 동력을 줬습니다. 샤를리 테러도 유럽에서 들끓는 무슬림 혐오를 비등점으로 끌어올릴지 우려됩니다.
암살된 라트는 사실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비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때문에 나치 친위대의 감시를 받는 대상인데,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항의하는 테러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샤를리 에브도>는 비록 무함마드를 풍자하기는 했으나, 서구에서 무슬림을 혐오하고 배척하려는 극우세력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습니다. 유럽의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던 <샤를리 에브도> 편집진의 희생은 그 다문화주의를 거부하는 유럽 극우주의 확장에 이용되는 상황입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처- 2015년 1월 20일 <한겨레>)
나치가 저지른 ‘수정의 밤’과 헌재의 판결
장정일 (소설가) | webmaster@sisain.co.kr
히틀러나 나치 관련서는 어느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온다. 특히 지난해에는 같은 달에 나온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과 이본 셰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여름언덕)을 시작으로 다양한 시각을 가진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시대의 풍향을 읽는 데 민감한 출판 편집자들이 박근혜 시대와 히틀러 시대 사이의 유비를 포착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앞일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참언(讖言)일까, 거짓으로 꾸며 남을 헐뜯는 참언(讒言)일까? 1955년에 출간된 밀턴 마이어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갈라파고스, 2014)는 지금도 나치 시대를 이해하는 필독서로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
마이어는 1935년 한 달 동안, 미국 언론인 신분으로 히틀러와 인터뷰를 하고자 시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그때 지은이는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미국에서 생각하던 것과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치즘은 선동되기 쉽고 수동적인 대중 위에 군림하는 악마적인 소수의 독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운동이었다. 나치즘을 알기 위해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은 히틀러가 아니라 평범한 독일인이었다는 확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7년이 지난 뒤 다시 독일을 찾아, 나치 당원이었던 평범한 독일인 10명을 만났다.
1년 동안 독일에 살면서 지은이가 밀착 취재한 나치 시대(1933∼1945)의 평범한 시민은 14세에서 57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대이고, 직업도 고등학생·고등학교 교사·수위·제빵사·경찰관 등 제각각이다. 연령이나 직업이 갖가지인 만큼 이들이 나치가 된 이유도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신념에 찬 나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7000만 독일 사람 중에 6900만이 ‘평범한 나치’였으며, 그 가운데 제3제국을 위해 미쳐서 날뛰는 광신적 나치는 100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지영 그림
평범한 나치는 취업과 사회적 안정을 목마르게 찾으면서 승진이나 주변의 인정 같은 사소한 실리에 밝았던 소시민이었다. 이들은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말썽 없이 처신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저울질했고, 국가가 적으로 지목한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옹호함으로써 그 자신이 공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국민이 알아서 순응하는 이런 국면이야말로 나치를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국가가 반겨 마지않을 상황이다.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1938년 11월 9일(이날과 10일 밤 사이에, 나치 당원과 동조자들이 독일 전역의 유대인 교회와 상점을 파괴했다. ‘수정의 밤’이라 불린다)은 나치가 평범한 독일인의 도덕적 의지를 타진해본 상징적이고 의도적인 사건이었으나, 저항에 나선 독일인은 없었다.
“폭군은 폭정이라는 시커먼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몇 사람의 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실제의 저항을 걱정할 뿐이다. 공동체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도덕적 습관을 인식하게 되는 일종의 허용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나치는 미리 계산해야 했다. 국가 위기 상황이나 냉전의 경우에는 허용 한계가 더 늘어났고, 전쟁의 경우에는 허용 한계가 훨씬 더 늘어났다. 하지만 폭군은 반드시 허용 한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의 계산이 사람들의 기질을 크게 넘어서는 정도가 되면 ‘봉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도덕적 의지와 저항성은 어떻게 사라졌나
히틀러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1933년부터 유대인 가스 학살이 시작된 1943년에 이르기까지, 제3제국은 평범한 독일인의 도덕적 의지와 저항성을 시험해보는 노골적이고 은밀한 수백 가지 단계를 밟았다. 각각의 단계는 저항에 부딪히기는커녕, 실리에 밝았던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그다음 번 단계에 깜짝 놀라지 않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증언자는 말한다. “C단계는 B단계보다 아주 더 나쁘지는 않았는데, 만약 당신이 B단계에 대해 맞서지 않았다면, 왜 굳이 C단계에 대해서 맞서야 할까요? 이런 식으로 결국 D단계까지 간 거죠.”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밀턴 마이어 지음 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 펴냄
평범한 나치로 가득했던 나치 시대의 독일 국민에 대한 지은이의 판결은 냉정하다. 비록 법적인 논의는 불가하겠지만 “나치 정권 당시에 실시되거나 시도된 일 치고 독일 국민의 찬성을 받지 않은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전체는 유죄”라는 것이다. 가혹한 판결 같지만, 이런 주장은 마이어보다 앞서 나온 카를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앨피, 2014)의 요점과 직결된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철학자였던 야스퍼스는 1946년에 출간된 이 문서를 통해 나치 청산에 대한 심도 깊은 기준을 제시하고자 했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죄를 네 가지로 나누었다. 국가 폭력과 인종 학살을 저지른 나치에게는 당연히 ①법적인 죄과가 부과되며,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에게는 ②정치적 죄가 적용된다. “내가 국가 권력에 복종하고 국가 질서를 통해 나의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면 정치적 죄는 바로 국민이라는 지위에 있다(죄라기보다는 정치적 책임이다). 우리가 어떻게 통치를 받고 있는지도 공동 책임이다.” ③도덕적 죄는 모든 개인적 행위가 나의 양심이나 친구·이웃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며, 도덕적 죄의 전제이기도 한 ④형이상학적 죄는 내가 인류의 일원으로 희생자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생긴다. 이 죄는 내 개인의 도덕적 악행이나 오류와 무관한 ‘형이상학적 부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는 한나 아렌트가 1961년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하고 떠올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선취한 노작이면서,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저 유명한 시를 독일 바깥에 널리 퍼뜨리기도 했다.
“그들(나치)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를 나치가 저지른 ‘수정의 밤’과 같은 폭거라고 이해한다. 이 말만은 참언(讖言)이 아니라 참언(讒言)이 되기를 고대하지만, 난망한 기대이리라.
(출처-2015년 1월 10일 <시사인> [382호] 68,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