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의 방
1. 경향신문 2007년 5월 18일치에서 펌.
2. 글쓴이는 이영만 논설위원.
[여적] 강아지 똥
‘돈 키호테’에는 세르반테스의 고난한 삶이 녹아있다. 58년의 긴 인생을 산 후 비로소 태어났다. 그것도 햇빛 한줌없는 감옥에서. 가난한 집 아들로 교육다운 교육을 받지못했던 그는 24세 때 레판토의 해전에서 왼쪽 팔에 부상을 입었다. 28세 때에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네차례나 탈주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38세 때 여러 편의 희곡을 썼으나 모두 창고에서 썩었고 살기 위해 세금징수원으로 나섰지만 영수증을 잘못 발행한 탓에 감방에 들어갔다. 스위스의 철학자 C. 힐티는 ‘고난은 미래의 행복을 의미한다. 난 고난을 당했을 때 희망을 품었다’고 했지만 고난은 훨씬 많은 경우 좌절이 되고 치유하기 힘든 아픔이 된다. 고난이 희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동화작가 권정생은 고난의 삶을 살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으로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사회에 뛰어들었다. 끼니거리가 된다 싶으면 나무장수든 상점의 점원이든 무엇이든 했다. 믿는 건 오직 몸뚱아리 하나였지만 하늘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타관살이 수년 만인 19세 때 결핵이 엄습했다. 할 수 없이 고향집으로 돌아갔지만 형편상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다시 길을 나선 그는 안동 근처 조그만 시골예배당 종지기가 되었다. 가난과 병마를 친구처럼 달고다녔던 그의 여정은 세르반테스가 들어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작은 아픔, 잔인한 상처, 슬픈 사연도 그의 깨끗한 영혼을 거치면 아름다움이 되었고 강아지똥, 매맞는 할미소, 오소리네 꽃밭, 너구리, 생쥐와 개구리, 양계장의 닭 등 세상에 버려진 하찮은 것들도 그의 따뜻한 손길에 잡히면 더없이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모두가 밟으면 재수없다고 했던 개똥이 자신의 몸을 녹여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강아지똥’처럼.
“그저 생명과 어울리는 거지. 쓸데없는 걸 참 많이도 썼어. 그저 바람부는 대로 춤추는 허수아비처럼 못나게 살았어.” 가는 날까지 산촌 오두막에서 살며 바람과 햇빛과 시냇물을 벗삼았던 결코 ‘못나지 않은’ 무욕의 삶. 빈손이었지만 그는 100여편의 그림 같은 이야기를 남긴 마음의 부자이다. 그의 글은 우리네 혼탁한 정신을 언제까지나 맑은 눈물로 깨끗하게 씻어줄 것이다.
〈이영만 논설위원〉
수풀이 우거진 권 선생의 집
군소리:
1, 바로잡음: 권정현->권정생 (이전 글에서 이상하게도 줄기차게 이름을 잘못 썼다).
2. 참 잘 쓴 글이다. 세상 한 복판에서 정신없이 뛰던 '신문쟁이'가 지친 몸을 추스르며 어느날 '두메산골'의 도인을 찾아가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지식인한테서도 맑은 눈을 볼 때 그 기쁨 또한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