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랫 글은 2006년 10월 3일자 데니스 페린Dennis Perrin의 개인 불로그 글을 옮긴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전 날(10월 2일) 펜실베이니아 주 랭카스터 읍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으로 다섯 명의 아미쉬 소녀들이 희생되고 난 후 쓴 글이다.
2. 아미쉬 공동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1985년 해리슨 포드와 캘리 맥길리스가 주연했던 영화 "목격자Witness"를 무척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영화는 현대문명과 거의 완전히 단절된 채 엮어가는 아미쉬 교도의 삶을 빼어나게 그렸다. 특히 그들의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배경으로 가을바람에 출렁거리는 광활한 밀밭 풍경은 가슴을 파고들 만큼 압권이었다. 만일 영화가 활극적 요소를 줄이고 좀 더 내면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틀림없이 명작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달랬었다.
먼 길 데니스 페린
“20년 전 소녀한테서 받은 모욕이 나를 이 지경까지 내몰았다. 나는 그걸 알기 위해 죽는다.” 이웃에 사는 찰스 로버츠는 펜실베이니아 아미쉬1) 학교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이웃이 의도적으로 “죽는다”는 말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난 그랬기를 희망한다.
지방 경찰에 따르면 로버츠는 열두 살 때 아미쉬 소녀에게서 입었던 아주 작은 마음의 상처를 비틀린 마음에서 앙갚음한 것이라고 한다. 아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버츠가 자신의 동기를 기록해놓은 진술서 같은 것을 남겨놓지 않은 한, 왜 그가 자살로 마감하기 전 많은 아미쉬 소녀들을 죽이려 했는지 묻혀버릴지도 모른다(AP통신에 따르면 로버츠는 옛날에 어린 친척들을 희롱했고 또 다시 이런 짓을 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어쨌든 로버츠는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말로 충분하리라. 또한 하느님께선 로버츠의 가족은 물론 죽고 다친 소녀들의 가족을 돌보셨다. 나는 가족들이 지금 겪고 있을 악몽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이와 같은 국내 범죄에 오래 마음을 두지 않는 편이다. 우리가 처한 폭력적 조건이 깊이 스며든 채 그치지 않는 탓에서다. 그러하기에 여기에 광범위한 논평을 해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10대 후반이었을 적 네댓 해 동안 내가 살았던 곳 근처에서 아미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그들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품행을 떠올리다 보면 어제의 학살이 보다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북부 인디애나는 미국에서 펜실베이니아 다음으로 아미쉬 교도와 메노파 교도2)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대체적으로 시골길에 들어서면 어느 때 어딜 가도 아미쉬 사람들과 함께 말이 끄는 사륜마차를 볼 수 있다. 차를 타고 아미쉬 지역을 지나가 보라. 마치 19세기를 여행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러한 모습을 덮어놓고 칭찬하거나 진기하게 보려고 해선 안 된다. 현대를 거부하는 그네들의 삶의 방식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해서 ‘착취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을 벗고 거칠고 손으로 꿰맨 그들의 복장을 갖춰보고 싶은 유혹을 느껴보진 못했다. 아무튼 내가 그들의 모자를 걸치면 우스꽝스러우리라.
이렇듯 나는 진보한 기술과 길들여진 이미지로 인해 타락하고 망가졌다. 하면서도 나는 아미쉬가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삶을 아직도 높이 평가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부족 특유의 생활양식은 기술과 이미지의 예에서 항상 그렇듯이 숱한 감정적 심리적 위험을 안고 있다. 게다가 전 지구에 걸쳐 즉각적 메시지가 오가는 시대에 목가적인 환상을 간직해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어린 아미쉬들은 그들의 농장 밖에서 번쩍거리는 노리개들과 유혹을 잘 알고 있다. 특별히 나는 이런 점을 조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적다할 수 없는 수의 꼬마들이 기회가 되면 울타리를 벗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도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다. 아미쉬의 10대 소녀들은 고센3) 같은 도시에 들어가면 주유소의 화장실에서 티셔츠와 등이 드러나는 운동복과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이러한 사례는 한창 자라나고 성적으로 눈뜬 사람에게 문화적 억압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났다. 그래서 록 음악을 내키는 대로 연주할 때 따르는 배교의 몫을 똑똑히 보며 자랐다. 그러나 어느 따뜻한 가을날 오후 나는 멀리 떨어진 시골길에서 이런 열망을 듬뿍 품어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돼 쓰레기 수거작업을 했을 때 나는 아미쉬 마을에서 보내는 날을 제일 좋아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곧장 아미쉬 마을에 들렀는데 노동으로 친다면 거저먹는 일이었다. 아미쉬 신도는 쓰레기를 큰 철제 통에 담아 밖에 내놓지 않는다. 트레일러 주차장에 사는 현대의 거주자들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길가까지 끌고 가거나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꽉꽉 쓰레기통을 채웠다(부서진 티브이, 똥 묻은 옷가지, 죽은 고양이). 아미쉬의 쓰레기는 갈색의 종이봉투에 담겨 꼰 실로 묶어 말끔하게 싸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예 쓰레기를 만들지 않거나 가장 건설적인 살아있는 재활용자들이였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그들의 쓰레기는 가벼웠기에 다루기에 무척 편했다. 나와 동료 한 사람은 계속 움직이는 트럭을 따라 길을 뛰어가며 꾸러미들을 낚아채 트럭의 냄새나는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동안 여러 번 밟았던 트레일러 주차장 노선의 경우는 곧잘 깜깜해진 후까지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반대쪽의 노선을 택하자 정오인가 오후 1시 쯤 되어 작업은 끝났다.
어느 날이었던가 고센으로 돌아가는 도중 운전수가 포장하지 않은 갓길로 트럭을 몰았다. 운전수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시야에는 다른 차들도 없었다. 나와 사이가 안 좋았던 동료(내가 만일 읽을거리로 책을 가져왔다면 그는 불쾌했을 게다)는 트럭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음을 느꼈을 때 실상 정답게 얘기하면서 살갑고 평화로운 시골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틀림없이 시속 35-40 마일의 속도로 쓰러졌을 테고 나와 동료는 뒤로 내동댕이쳐져 도랑에 처박혔다. 가볍게 찢긴 상처 몇 군데를 제외하고 우리는 말짱했다. 두 사람이 트럭 운전석으로 달려가 운전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차창은 금이 갔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운전수는 자신의 몸을 끌어내고 있었다. 떨고는 있었으나 놀랍게도 다친 데가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오자 그는 넘어진 트럭 주위를 돌며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하더니 벌어진 소동에 욕지거리를 해댔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우리는 휴대전화가 나오기 이전 시대의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운전수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계속 트럭에다 호통을 쳤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네댓 명의 나이 든 아미쉬 교도가 다가왔다. 그들 뒤에는 몇 명인가 10대의 소년소녀들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괜찮으냐고 묻고 나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냐고 했다. 운전수는 즉시 저주를 멈추고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아미쉬 교도에게도 전화가 있을 리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10 마일 쯤 떨어진 가장 가까운 주유소로 운전수를 데리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리하여 운전수는 두 명의 노인들과 함께 사륜마차를 타고 길을 따라 사라졌다.
동료와 나는 머물며 트럭을 지키라는 말을 들었다. 왜 누군가가 넘어진 쓰레기 트럭과 같이 있어야 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서서 악취 더미를 감시했다. 노인네들이 가버린 가운데 10대의 아미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마구 질문하기 시작했다. 거의가 다 맥주 마시는 것과 록 음악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10대들은 딱딱하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그들은 마치 집에서 말하던 방식과 몰록4) 귀화인들이 망쳐 놓은 언어 사이에 놓인 틈을 메우려는 듯이 말했다. 궁금해 하고 부러워하면서 10대들은 혹시 노인들이 오지 않을까 계속 뒤를 살폈다. 소녀들은 시시덕거리고 낄낄거렸다. 눌러 쓴 모자 밑에서는 눈이 깜빡거렸다.
한 소녀가 하트 악단Heart band을 좋아하냐고 내게 물었다. 실은 안 좋아했지만 소녀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소녀는 수많은 당대의 록 음악에 빠져있었다. 음악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소녀의 두 눈은 밝아졌다. 나는 즉시 그 소녀에게 끌렸다. 그러나 또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대체 무슨 수로 아미쉬 소녀 한 명을 달랑 불러내겠는가. 게다가 불법 포식자가 쓰레기 트럭을 분해하여 처분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만 했다. 정녕 꼬드김을 받을 시나리오가 못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소녀와 상냥하게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은가. 소녀가 미소 짓고 낄낄거리는 바람에 소년들이 불쾌한 낯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노인들이 나타나고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으러 집에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모든 것은 끝이 났다. 그렇게 말한 노인은 우리를 쏘아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한 시간 쯤 지나서 운전수와 함께 예인 트럭이 왔고 우리는 돌아왔다. 물질주의자의 낙원으로 말이다.
이따금 그 소녀가 생각난다. 성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유쾌하고 거의 순수한 생각에서. 과연 그녀가 아미쉬 신자로 남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종족을 이어가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자신만의 삶을 찾고야말겠다는 분명한 불꽃이 타올랐었다. 어떤 선택이었든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선택이란 게 여전히 하트의 음악을 듣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주: 1). 아미쉬Amish:
메노나이트 교회에 속하는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를 일컫는다. 현대문명을 철저히 거부하며 전통적 농업을 기반으로 삼으며 주로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아나주에 모여 살고 있다. 18세기 식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입고 남자는 구레나룻을 기르고 여자는 19세기 식 보넷 모자를 쓴다. 예배당도 따로 없고 신자 개인 집에서 예배를 본다. 병역거부와 학교취학을 거부했으나 요즘은 많이 사회와 접촉하며 산다고 한다.
2). 메노나이트Mennonite:
네델란드의 종교개혁가 메논 시몬즈가 1583년에 설립한 교파로서 재세례 파 중 최대교파. 17-18세기에 크게 융성. 세상과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며 오늘날에는 미국, 캐나다에 집중돼 있다.
3). 고센Goshen:
인디아나 주의 도시. 메노나이트 파가 세운 고센대학이 있다.
4). 몰록Moloch:
히브리어로 Molek. 원래 바빌로니아 지방의 죽음의 나라(명계)의 신이었고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하늘의 신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섬겼으나(사도:7:43)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때 전부 퇴치됐다(열왕23:10~).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