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주일(10월 21일)은 동대문교회 축성 마흔여덟 돌을 기리는 날이었다. 여느 해 축성기념일처럼 이경호 베드로 주교께서 교회를 방문하셨다. 현 서울교구장이시고 착좌하신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이날 이 주교께서는 설교와 견진성사(강단아 안나)를 베푸셨고, 특별히 오후에는 교우들과 환담하는 자리(“주교님과의 대화” 오후 1:30~2:30)까지 마련하셨다. 간담회를 마친 이날 오후 귀가한 후 책상 앞에 앉으니 문득 주교님의 설교와 간담회를 함께 묶어 홈페이지에 정리하고 싶어졌다.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이전에도 축성 기념일이면 그렇게 기록해왔으니까. 그러자 혼자만의 기억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모름지기 이면의 의미까지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먼저 김창수 바우로 회장과 카톡으로 말을 섞은 다음, 천상화 요한 신부께 전화를 걸게 됐다. 실상 서로 처음 주고받는 대화였다. 그런데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금세 뿌듯해지는 마음과 함께 젊으신 성직자에게 향하는 신뢰감을 절로 경험했다. 또한 친절하게 응대하는 신부 덕분에 모든 대화내용을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전화기 너머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홈페이지를 개편하려고 합니다. 주소마저 틀리는 데가 있어 바로잡아야 할 뿐더러 디자인과 메뉴도 바꿀 겁니다. 당연히 교회 홈페이지의 기본도 생각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대내 결속을 위함인가, 그보다는 바깥을 향하는 선교성에 무게를 두느냐 하는 거겠죠. 개편 방향은 선교성에 중점을 둬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게다가 요새 추세는 개인 컴퓨터로 정보를 찾지 않지요. 스마트폰 기기를 매개로 접근하기 좋게 홈페이지를 만든다고 할까요.”
미션(선교)! 그야말로 정통이자 기본의 길이다. 즉시 찬성했다. 퍼뜩 떠오르는 대로 겨우 <교회연혁>에 대한 기술이 너무 빈약하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2006년 홈페이지를 개설했을 때 무엇보다 대내 소통에 눈길이 쏠렸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찌 복음 전파를 욕망하지 않았겠는가. ‘누군가 홈페이지를 보고, 아, 이 교회 정말 좋은 데구나’하고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는 꿈도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동대문교회 사람들> 방을 우선 보기 좋게 꾸미고 싶었다. 곧 위원들 중심으로 고정 칼럼 방을 꾸미고자 해봤으나 발상 단계에 그쳤을 뿐, 잘 되지 않았다. 교류/연결망(링크)도 그 중 하나인데 영국 성공회공동체연결망(Anglicans Online Org.)이 대표적이다. GFS도 있다. 실제로 영국 홈페이지의 경우, 그동안 상당량의 기사를 홈페이지에 옮겨 싣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남겨놓을 만한 요점이라 생각하여 적어 봤다.
짧게 줄이자. 위에서 글쓰기라 했지만 글올리기/싣기가 더 정확할 성싶다. 내가 올린 글 대부분이 국내 일간지 칼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되도록 자기 글을 많이 쓰려고 노력했다. 전문지식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결국 역량과 믿음의 문제였으니 의욕만큼 이루진 못한 것 같다. 더구나 지난 2년 여 기간에는 글 한 줄 올리지 않았다. ‘예배에 불성실한 신자가 홈페이지에 글이라니’ 어쭙잖다 생각하고 올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알다시피 4.27 판문점선언에 한껏 고양되어 다시금 교회 홈페이지를 찾았고 지금까지 왔다. 이제 젊으신 사제 세 분이 오셔서 정말 마음이 든든하다. 개편 작업 무조건 신뢰한다. 선교성에 비춰 필진(?)도 면모 일신하여 구성하면 되겠다. 이제 글 안 올려도 되니까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참고로 적고 싶다. 그동안 남의 글 올리기 쉽지 않았다. 글을 놓고 대개 버릇처럼두 번 정독한 다음 독자들(교우) 반응까지 생각하며 뜸 들인 후에야 올렸다. 저작권이야말로 늘 심적 부담이 됐다. 그리하여 필자에게 직접 전화 걸어 허락을 얻은 적도 여러 번이고, 출판사/신문사/잡지사의 동의를 얻고 비로소 게재했다. 어느 땐 미 시사주간지 <TIME>
끝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한 공로는 정호철 신자회장과 김충진, 최유진 두 신부에게 돌아간다.(당시 부제와 전도사) 그 이전에는 <다음> 사이트에 “동대문교회 까페”가 있었다. 이처럼 홈페이지의 전신이라 할 까페를 운영한 이는 황삼익 교우다. 그리고 처음엔 “글쓴이”들이 풍성했다. 현역 시인(안중득 교우)과 앞서 말한 두 신부를 포함하여, 박금년, 정태두, 차준명, 정호철, 조세형, 유재철, 임희승, 임연승, 이수진, 이금양, 이영애, 이지호, 이지수, 조상철, 박완준, 이혜련 교우...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관할사제로선 안철혁 신부가 두드러지게 활동하셨다.
해마다 늦가을에 나왔던 <비둘기>지를 지극히 사랑했던 원로 문필가도 기억하고 싶다. 조병선 요배, 김윤모 빠실, 이석근 베드로 교우님들이다. 인터넷과는 끝내 친숙하지 못하셨던 듯하여 아쉽기도 하다. 필명도 잊을 수 없다. 쿠마(일본 말로 곰), 미투리, 뜨와에 무와, 가람과 뫼, 차니콜라, 오두마차...특히 차준명 니콜라는 개설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올리셨다. 병상에서 지금도 글을 올리실 정도다. 지면을 빌려 준명 형이 어서 나으시기를 빌 따름이다.
끝으로 글을 마치면서 이번 이경호 주교님과의 대화도 여기에 적지 않으려 한다. <새벽강>, <강 건너 숲>은 더 이상 홈페이지에 나오지 않는다. 뭐 다 아시겠으나 나는 그동안 이 두 이름을 번갈아 가며 썼다. 오래전 잠깐 고딩청년, 비둘기떼, 나무와 빗방울을 쓰기도 했다. 반면에 신명 도미니꼬는 좋아하는 이름인데도 한번도 안 썼다.
정호철 신자회장은 새로 부임하신 세 신부님들이 무척 마음에 드시는가 보다. 나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