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향2] 2006-12-05에서 펌.
2. 글쓴이는 강제윤 시인/여행가.
원제: 티베트에서 보낸 한 철.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려고 하지 않았으니, 삶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소로우)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사람들은 늘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고 산다. 다른 사람들도 늘 내 삶에 관심이 많은 듯이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으로 떠드는 것과는 달리 타인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자기 자신이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에게만 몰입한다.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대체로 타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 초모랑마(chomolangma)에 오르면서도 그렇다. 사람의 관심사는 결코 산이 아니다. 산에 오르는 자기 자신이다. 뉴팅그리에서 불과 30분 거리, 마을 입구부터 초모랑마 국립 공원이 시작된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영국령 인도 측량 장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티벳 이름 초모랑마는 ‘대지의 여신’이란 뜻이다. 네팔어로는 ‘서가르머타’지구의 머리다. 일개 식민주의자의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너무 성스러운 산이다. 몇 킬로나 달렸을까. 드디어 설산이다. 산정까지는 아직 먼데 벌써 손발이 시리다.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오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산정에 잠시 멈추었던 차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간다. 초모랑마의 심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 깊은 산중에도 마을들이 있다. 다섯 시간쯤 산속을 달려 롱북 사원에 도착한다. 롱북은 티벳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원이다. 다시 숨이 차다. 여기서 초모랑마 베이스캠프(EBC)까지는 걷거나 말을 탄다. 어딜 가나 한족 여행자들의 수가 월등히 많다.
초모랑마
가장 낮은 곳이 가장 높은 자리가 되기도 한다. 초모랑마 또한 옛날에는 바닷속 깊은 땅이었으나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우뚝하다. 그러나 초모랑마는 그저 척박한 돌산일 뿐이다. 높든 낮든 산은 산이다. 산의 서열을 정한 것은 인간이지 산은 아니다. 산들이야 높고 낮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열을 가리기 좋아하고 차별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최고봉이라는 허상. 초모랑마는 없다. 그저 만년설 뒤덮인 돌산이 하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산도, 산은 품이 너르다. 아무리 척박한 돌산일지라도 수많은 생명을 먹이고 살린다. 초모랑마 산그늘에 기댄 사람과 양떼와 야크와 키 작은 풀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높이로 세계를 본다.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높은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지 놀라워하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높은 산속이 세계의 중심이다.
아프리카나 알래스카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세상의 중심은 자기가 사는 땅이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삶을 틀린 삶이나 기이한 삶으로 단정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롱복 사원에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길은 마차로 한 시간 거리다. 초모랑마, 저 가파른 산에서 숱한 목숨들이 죽거나 불구가 됐다. 정복 혹은 등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뿐인 귀한 목숨이지만 사람이 때때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더 많은 목숨을 구하거나 인간의 존엄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때가 그런 때다. 하지만 희생이 아니라 욕망을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는 목숨을 능멸하는 행위다.
초모랑마 입구 유채밭
저 산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국가나 집단,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라져 갔는가. 물질적 욕망뿐만 아니라 정신의 욕망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는 행위는 결코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산악인들은 다르다 하겠지만, 이를테면 높은 산에 대한 욕망과 최고의 스피드를 추구하는 욕망은 어떻게 다른가. 최고봉에 대한 욕망에 목숨을 거는 것과 최고의 속도에 목숨을 거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둘 다 동일한 정신적 욕망의 작용이 아닌가. 욕망을 위해 바쳐지는 목숨의 가치에 차등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자동차광이 속도에 목숨 바친 것을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 산악인이 산에 목숨 바치는 것은 거룩하게 여긴다. 이상한 일이다.
롱북 사원 게스트 하우스 레스토랑의 저녁은 티벳 소녀 치링 남루의 야크 똥 난로 지피는 연기를 따라 들어온다. 열 두 살짜리 꼬마 숙녀 치링은 혼자서 종일토록 레스토랑의 손님들을 접대하고 물통을 저 나르고, 난로가 꺼지지 않도록 야크 똥을 넣는다. 연기 자욱한 레스토랑 안은 소란스럽다. 중년의 독일인 여자는 팬케익을 씹으며 운다. 함께 앉은 남자가 안아서 달랜다. 티벳인 랜드크루저 운전사들은 카드 놀이에 여념이 없고, 잔뜩 싸온 음식을 떠들썩하게 꺼내 놓고 먹어대던 한족 단체 관광객들은 누추한 롱북 사원에 머물지 않는다. 사원입구에 지어진 정부 기관 건물에 머문다. 외국인 여행자들은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일곱 살짜리 레스토랑 주인 아들은 생라면을 씹으며 싱글거린다. 일과가 끝나고 치링은 멋지게 차려 입은 남자친구를 이끌고 어느 방으론가 사라진다.
초모랑마에서 올드 팅그리로 가는 길이 간밤 비에 막혔다. 어제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어제 탄성을 자아냈던 고개 마루의 눈들이 비에 다 녹아버렸다. 어제의 설국이 오늘은 그저 흙과 자갈에 덮인 흔한 민둥산일 뿐이다. 신비로움은 한 꺼풀 눈이 덮인 것에 지나지 않다. 눈 녹으면 이토록 부질없다. 본질은 자주 신비의 포장 아래 은폐되지만 한 차례 비나 햇빛으로도 쉽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신비로움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신비가 없다면 삶은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실에 눈 떠야 살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신비에 눈 감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삶의 신비란 인간이 삶의 고통으로부터 삶을 견뎌 내게 하는 빛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