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기로 한 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미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요한 1:32-34 참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 3:12).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강력한 심판은 아직까지 없을뿐더러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례자 요한 두고 가장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새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한 단계 뛰어넘은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 준수에 따라 상벌을 결정하는 심판의 방식이었지만, 신약은 그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정신, 곧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과도 함께 지내셨습니다. 신약의 새로움은,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