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이라 하면 그들은 율법에 얽매인 자, 교만한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려고 했던자들로 나쁜 사람들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지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하느님께 순종하려 하였고, 그런 그들은 유대인들의 존경 속에 권위를 가지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의 대화 속에 많이 언급되고 예수님과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질까요?
그들은 일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을 이해하는 척도였습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삶, 지적인 삶, 유대인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삶을 일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 그 모습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충족 시켜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유대인이 이해한 하느님은 율법적이고, 유대인공동체만을 위한 것으로 편협하게 변해 버린 것이죠.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출애굽 사건은 율법적이고, 유대인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소중한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만을 위한,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율법만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느님의 이해를 뛰어 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를 사랑하시고, 율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나는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 34절)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율법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율법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모든 자연에게 적용되는 새로운 율법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새로운 계명, 율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우리는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내가 항상 위로받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거 같은데
사랑을 율법이라 하면 내가 누군가에게 실천 해야 할 의무감이 생기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의지와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그것을 실천과 의지로 해야 하는 기독교인의 율법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는 진지함과 진정성 속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죄 성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 죄의 고백은 우리를 구원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율법에 잡혀있습니다. 이 사랑의 율법을 진지함과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