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一片丹心)
고려 말에 이방원과 정몽주가 사뭇 운치 있게 시조로 수작을 부린 과정은 꽤나 흥미롭다. 먼저 이방원이 넌지시 ‘하여가’를 던진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참 좋은 제안이다. 한 오백 년 살자는 것이야 모두의 요망 아닌가. 더구나 힘 있고, 돈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돕고 살며 꽁꽁 얽혀서 함께 잘 살아 보자는데 그 누가 마다 하겠는가.
하지만 정몽주는 삐딱하게(?) 읊어댄다. 이른바 ‘단심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남은 살아보자고 권하는데 본인은 한사코 죽겠다고 하니, 참 한심스럽고 딱한 노릇이다. 그렇게 고집부리다가 결국 그는 한 조각 붉은 마음만 남겨주고 졸지에 선죽교에서 맞아 죽고 만다.
그러면 예수는 어떠했는가? 30년의 침묵을 깨고 정든 집을 떠나 광야로 나왔을 때, 그의 귀에는 ‘하여가’가 들려왔다. 세게 밀어 줄 테니 이 한 세상 멋들어지게 마음껏 즐겨 보라는 속삭임이다.(루가 4:1-13)
사탄의 유혹이 어떠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1)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이 빵이 되게 하라.
(2) 내 앞에 절하면 이 화려한 도시를 네게 주겠다,
온 백성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게 해 주겠다.
(3)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예수가 갈릴래아 촌구석을 누비며 기쁜 소식을 전할 때도 그의 주변에는 ‘하여가’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대다수 군중들의 뜻이었다. 가장 가까운 측근인 제자들까지도 스승 잘 만난 덕분에 높은 자리에 공천 받아 보자고 쑤셔댔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마당에서도 한번 본때를 보이라는 요구는 여전했다.
그럼에도 예수의 일편단심은 엉뚱하게 대단했다. 열화 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따 놓은 당상일지도 모르는데, 그는 모든 자리를 포기하고 대신 섬기겠노라고 선언한다. 밀어주고 떠받들겠다는데도 거절하다니, 군중들의 마음이 심한 배반감에 휩싸이며 사태는 급속히 악화된다. 그래도 멍청하게 “계속해서 내 길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게다가 제자들과 회식을 하다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내 몸과 피를 받아 먹어라” 그래도 혹시나 하며 실날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꿈이 사그러든다. 역시나 우리 스승은 어쩔 수 없구나. 유다 같이 눈치 빠른 친구는 재빨리 발을 빼버린다. 그 후 아무도 없이 침묵과 절망 속에서 예수는 숨진다.
그런데 거기서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 십자가 밑, 꽉 막아 놓은 돌무덤 속에서 놀랍게도 부활이 잉태되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