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성서 말씀을 보면 두 아들이 나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받고 돈을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큰 아들은 항상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며 삽니다. 결국 작은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께 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혼내기는 커녕,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음악과 춤으로 잔치를 열어줍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평생 순종해온 자신에게는 새끼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립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명령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이 결국 놓치고 만 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명령만 따랐지,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큰 아들의 순종은 반쪽 자리 순종이었던 것이죠.
우리는 이 성서말씀을 들으면 난 두 아들 중 어느 쪽에 속한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은 모두 큰 아들과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참석해서 설교 말씀을 듣고, 영성체를 한다는 것은 이미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자세인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참다운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역시 큰 아들의 반쪽자리 순종에 빗대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한 순종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에 대한 순종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는 나를 위한 복종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갖은자보다는 못갖은자, 높은자보다는 낮은자, 고결한자보다는 흠이 많은자를 더 관심에 두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 전 우주를 향한 것이기에 특별히 사랑 속에 배제된 것 같은 그들에게 관심을 더 두었던 것이죠. 못난자, 가난한자, 흠이 많은자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서 말씀에서도 못난 작은 아들 역시 큰 아들 보다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작은 아들에게 더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하느님께 복종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순종을 하기위해서는 우리 역시 우리 교인들 속에 작은 자를 찾아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얼마 나오지 않는자, 냉담하는자, 어려움에 처한자, 아픈자를 찾아 그들이 주인공이 되게끔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온전히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라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오래 다닌자라면, 더욱 자신은 작은 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순절 우리는 주님의 부활 사건을 위해 좀 더 많은 이, 작은이를 이곳에 초대해야 하고, 예루살렘 입성 후 십자가 사건, 그 자체인 그분의 사랑을 전해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