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나무는 약 4000년 전 이집트에서 심은 기록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는 꽃은 있는데 보이지 않아서 무화과(無花果)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서에서 무화과 나무는 많이 언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화과나무가 나옵니다. 예수님 생존 시 예루살렘은 무화과를 3월, 가을 두 번 수확을 하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는 유월절 기간으로서 무화과가 열리지 않았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음에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예수님은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시며 ‘잘라 버려라’고 포도원 지기에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본문 말씀(루가 13:6-9)은 그동안 예수님의 주된 말씀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임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해서 매우 비판적이고 심판적인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예수님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권위적이고, 감정적이고, 심판적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열매가 열릴 수가 없는 조건인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잘라버려라 하시는 말씀 속에서, 이해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배고픔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우리는 배고프면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섭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서로 합의되는 공감과 소통을 위한 보편화 된 것이지만 감정은 지극히 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우리는 이성을 찾기 보다는 감정이 우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우선 내가 먼저 인 것이죠. 그것이 생명을 위한 법칙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는 예수님의 감정으로서의 대화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이성의 대화를 하십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누구나 알아 들 을 수 있는, 그리고 설득과 깨달음이 가능한 말씀과 대화를 하신 것이죠. 예수님의 주된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셨기에 우리 수준에 맞추어서 말씀을 하시다 보니 그런 이성적인 대화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처럼 화를 내시는 모습은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배고픔과 실망이 예수님을 감정적으로 만드셨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바리새인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에 예수님의 개인적인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지극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꾸 배반하는, 열매 맺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그런 그들, 배반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예비한 예루살렘 입성을 또다시 준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