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장사의 논리(論理)로 살아간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데 목적이 있다. 밑지는 장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은 투자로 몇 배, 몇 십 배의 이윤을 남기고, 가장 싸게 구입해서 가장 비싸게 파는 일은 모든 장사꾼의 바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장사의 논리로 산다는 말은 내가 이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크게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때로는 수고 없이 공짜를 바라는 수도 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는 어떤가? 여기도 장사의 논리가 적용될까? 그렇다. 적용된다. 하느님과 세상의 재물을 놓고 늘 갈등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하느님을 믿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열심히 사는 신자도 많고,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충 그리고 약간의 신앙생활로 세상과 하느님을 절충하는 타협형의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나라 행 열차를 탈 수만 있다면 구석자리도 좋고, 아니면 입석이라도 괜찮다는 식의 태평형의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약혼자보다 반지를 더 좋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어떤 재물과 그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한쪽으로 접어두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놓아버리셨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활동적으로 일하시면서 그분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림은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까지 익숙했던 곳을 떠난다. 이 떠남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에서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의미를 주었던 모든것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가족·고향·관계·재산·명예,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 의미와 힘을 주고 나의 약함을 보호해 주며 안전을 보장해 주던 것들로부터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도자들은 이 여정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