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34) 대한성공회 여성 성직 서품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1977년 성미카엘 사목신학연구원에는 3명의 여학생(최건덕, 이루시, 민병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졸업과 동시에 사목연구원 이사회에서는 10년 동안 여성 입학생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1982년 천신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설립 첫해부터 신학과에 여학생들이 입학하였습니다. 82학번 이미영, 83학번 김경희, 유명희, 84학번 이광숙, 박효순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과를 입학하고 졸업한다는 것이 여성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1991년 서울교구에는 ‘여성성직위원회’가 설치되었고, 3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1994년 서울교구의회에 ‘여성성직수용안’을 상정했습니다. 그러나 41:44로 부결되었고, 이 를 계기로 여성 성직 서품은 단순히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닌 교회 내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 되었습니다. 1997년 전국의회에서 당시 여성성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진만 교수는 주제 강연을 통해 ‘21세기를 바라보는 현시점에서 여성 인력 개발은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였고, 이는 선교 결의문에 ‘여성의 지도력 개혁과 성직에의 참여를 위해 이제 우리 대한성공회의 적극적인 검토와 결단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8년 전국의회에서는 ‘여성 사제직은 시급히 요청되는 시대의 과제이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방안을 마련한다.’라고 결의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1998년 이정운(페트라) 전도사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전교구 부제로 서품되었으며, 1998년 성소 주일에서는 ‘여성성직 실현을 위한 1천명 서명운동’을 통해 1,300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이 서명은 1999년 전국의회 안건으로 ‘여성 성직 수용 안’을 상정할 때 근거자료가 되었으며, 이 의회에서 여성 성직 수용 안이 결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병옥(카타리나) 전도사는 1999년 부산교구에서 부제로 서품되었고, 2001년 4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이 서품은 민병옥 사제가 1979년 사목신학연구원을 졸업한 지 22년만의 결실입니다. 이후 여성사제 서품 21주년을 맞이하는 2022년까지 24명의 여성이 서품되었습니다. 현재 서울교구에는 8명(해외파송 2명 포함), 대전교구에는 4명, 부산교구에는 2명의 여성사제가 활동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