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1) 천국은 어떤 곳인가요? 그리스도교인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주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 변화입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부활에 대한 생각이 천국이 어떤 곳일지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이 우리가 따를 본이라면, 지상의 삶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모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속성은 우리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기에 인식 가능한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불연속성은 우리가 시공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 이는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는 다소 과장된다 할지라도 애벌레와 나비를 예로 들곤 합니다. 해바라기 꽃 위에 기어오른 애벌레가 탈피 후에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나타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우리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우리의 삶이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보다 큰 그림의 맥락에 놓여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삶이 지닌 난해함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 큰 그림이 없다면 이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는 죽음 너머의 삶이 지금의 삶을 위한 중요한 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덧붙여 이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답변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회의하게 된 현대에 이르러 악과 고통의 문제는 더 난해해졌습니다. 이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비극적이 사건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 삶이, 정의가 승리하고 사랑이 악을 이기는 보다 큰 그림의 일부라면, 비극은 우리의 삶에 보다 덜 압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믿음이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없는 자를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죽음 너머의 삶은 지금 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에서“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다가올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소망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함을 깨닫도록 초대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