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남북정상회담의 의미와 성과
김연철 통일연구원장
출처: 2018년 9월 22일 [한겨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 18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함께 걸으며 평양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내용의
푸른색 대형 펼침막이 눈길을 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전쟁이 끝났다. 한반도는 이제 항구적인 평화로 간다. 평화가 오면, 북한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한반도가 달라지면, 동북아 질서도 달라진다. 남북관계가 전진하면, 북-미 관계도 돌아간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남과 북은 냉전의 강을 건넜다. 평화의 땅에도 수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이다. 이제는 냉전의 관성에서 벗어나,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고를 하자.
무장해제라고? 사실상의 종전약속
서로 칼을 든 긴장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칼을 들고 상대만 내리라고 하면 내리겠는가? 군사적 신뢰 구축은 말 그대로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너도 내리고 나도 내리는 그림에서, 내가 내리는 부분만 보고 ‘무장해제’니, ‘안보 약화’니 하면 되겠는가? 과거 대결시대의 사고다. 결국 군사적 긴장을 지속하자는 말이 아닌가? 전쟁 상태를 계속 유지하자는 말이다. 다수의 국민은 평화를 원한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동안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중무장’지대였다. 경계초소를 철수하고 적대행위를 중단해서 비무장지대를 진짜 비무장지대로 만들자는 합의는 비정상의 정상화에 다름 아니다. 공동경비구역(JSA)의 비무장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유엔사의 해체라고 말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비무장지대라는 완충공간과 공동경비구역은 알고 보면 정전협정의 내용이다. 오랜 비정상의 방치가 부끄럽지 않은가?
땅, 바다, 하늘에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완충공간을 설정한 이유는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경계초소를 철수한다고 해서 안보가 약화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둘러보자. 분쟁지역의 국경 근처에 병력을 밀집시킨 곳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칼싸움하던 삼국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서해 평화 정착을 보고 북방한계선(NLL) 포기라는 비판도 있다. 명백한 거짓말이다. ‘북방한계선은 해상에서의 기존 관할 구역’이라는 정부의 기본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구역은 선이 아니라 면의 개념이다. 평화의 공간은 대결의 선과 차원이 다르다. 이번 군사 분야 합의 중 해상에서의 ‘남북공동순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방한계선을 끼고 새까맣게 몰려드는 중국 어선을 보았을 것이다. 서해가 분쟁의 바다로 변했을 때, 중국 어선만 이익을 보았다. 이제는 아니다. 입구에 완충수역을 만들고 남북공동순찰대를 운영하면, 중국 어선이 들어올 수 없다. 평화의 바다가 곧 공동번영의 바다다. 평화가 경제다.
다만 한강하구의 공동이용에 관해서는 환경적 접근이 필요하다. 골재 채취로 얻을 수 있는 단기적 이익보다는 환경 보존으로 얻을 수 있는 장기적 이익이 더 크다. 남북 협력에서도 이제 ‘지속가능성’의 철학을 도입할 때다. 앞으로 진행될 한강하구 공동조사 과정에서 반드시 환경적 접근을 우선하기를 바란다.
신뢰가 쌓이면 ‘사실상의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해서 상시적인 군사협력을 시작할 때다. 군사공동위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의 중요 합의였다. 나아가 운용적 군비통제에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구조적 군비통제, 즉 군축으로 발전하는 방안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권의 합의를 이제 실천하자.
강압적 비핵화에서 협력적 비핵화로
비핵화의 진전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한방에 핵무기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술도 아닌데 그게 가능한가? 비핵화의 대상은 무기, 물질, 시설, 지식이다. 무기와 물질은 ‘안전보장’의 제공 없이 폐기할 수 없다. 관계가 변하지 않고 지식을 폐기할 수 있을까? 수십년 동안 유지해 왔던 ‘강압적 비핵화’는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왜 실패한 과거를 고집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말 비핵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했고, 트럼프 정부 임기 내에 해결하자고 했다. 목표와 시한을 제시했고, 이제 실행의 시간표가 필요하다. 이번 정상회담 합의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미국의 상응조치를 요구했다. ‘신뢰 구축으로 비핵화’는 북한의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북·미 정상의 약속이다. 이미 협력적 비핵화로 전환했는데, 여전히 강압적 비핵화의 시각을 유지하면 어쩌란 말인가?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는 중대한 진전이다. 핵실험장 폐쇄, 미사일 엔진시험장과 발사대의 영구 폐기는 미래 핵의 포기다. 영변 핵시설의 폐기는 현재 핵의 포기다. 북핵 역사 25년에 ‘현재 핵의 폐기 약속’은 처음이다. 과거 합의의 ‘동결’과 다른 개념이다. 시설을 모두 해체하고 나서 과거 핵을 해결하겠다는 입장도 아니다. 노후 원자로를 해체한 경험에서 보면, 핵시설 해체는 시간이 많이 든다. 트럼프 정부 임기 안에 과거 핵, 즉 무기와 물질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현재 핵의 해체와 과거 핵의 폐기를 병행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신고’ 프레임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은 바로 ‘실천적 조치’로 넘어가자는 입장이다. 신뢰가 없는 초기 국면에서 ‘신고’는 오히려 불신을 증폭시킬 수 있다. 비핵화의 사례를 보면 언제나 신고-사찰-검증이라는 순서를 밟지도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먼저 폐기하고 나중에 신고와 검증을 한 경우도 있다. 트럼프 정부 임기 안에 끝내려면 서둘러야 한다. ‘신고’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석달 이상 허송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남북이 앞에서 끌면 안 되나?
한-미 공조가 중요하다. 그래야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남-북-미 삼각관계를 선순환시킬 수 있다. 다만 한-미 공조는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목적은 당연히 북핵 문제의 해결이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다. 한·미 양국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의견 차이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믿음이다. 외교는 현실이지, 종교가 아니다.
알다시피 트럼프 정부 내부에는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그중 하나의 시각으로 한국 정부를 비판한다. 동시에 미국의 일부 강경파는 한국의 일부 언론을 활용해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한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갈등은 자주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워싱턴의 ‘전문가’라고 부르는 일부 사람들은 또 어떤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대부분은 이미 실패한 ‘강압적 비핵화’의 시각으로 현재를 평가한다. 이제 오래된 적대의 카르텔을 깰 때가 왔다.
낡은 대결시대의 공조는 성공하기 어렵다. 비핵화와 평화정착은 시련이 있어도 중단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한-미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미 양국의 공통의 이해가 있고,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그야말로 다양한 소통 채널이 존재한다. 그것이 다른 외교관계와 다른 한-미 관계의 특징이다.
2018년 고비마다 남북관계가 북-미 관계의 교착을 풀었다.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도 마찬가지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으로 막혀 있던 북-미 관계가 다시 움직일 것이다. 남북관계가 북-미 관계보다 한발짝 먼저 움직여서 정세를 풀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앞서가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한국이 한발짝 이상 앞서간 적이 있는가? 남-북-미 삼각관계의 특성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최근의 한·미의 차이는 한국이 앞서간 것이 아니다. 미국이 한발짝 후퇴해서 두발짝 차이로 벌어졌을 뿐이다. 미국을 따라 우리도 뒷걸음질 치면? 그러면 다시 대결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누구도 미국의 11월 중간선거 이후를 예상하기는 어렵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최소 하원에서라도 다수당이 되면, 과연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이 유지될지 모르겠다. 밤이 오기 전에 길을 재촉하자. 동시에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 미국 정치의 예측 불가능성을 대비해서 어쩌면 좀 더 폭넓은 대미 공공외교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왜 미국에도 한반도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이 없겠는가? 나아가 국제사회가 한반도 평화를 지지할 수 있도록 외교적 지평을 넓혀야 한다.
이제는 우물에서 나와 하늘을 보자
갈 길이 멀고 때로는 천둥 번개가 쳐도, 이제는 남과 북이 잡은 손을 놓지 말자. 남북관계가 변하지 않으면 최소한 후진은 피할 수 있다. 이제 전쟁을 끝내자. 백마고지에서 혹은 이름 모를 계곡에서 사라진 병사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넋을 달래자. 258㎞의 비무장지대를 평화의 완충공간으로 혹은 새로운 협력을 위한 접경으로 만들어보자.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고, 얼어붙은 개성공단이 다시 움직이고, 금강산 관광을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벌써 올해만 세번째 정상회담이다. 네번째의 만남도 기대된다.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이제부터는 상호 방문의 정례화가 이루어진다. 이미 상시적인 대화의 공간인 개성의 공동연락사무소도 문을 열었다. 지방정부의 도시교류도 활성화되고, 민간 차원의 사회문화 교류도 늘어날 것이다. 접촉을 하면 변한다. 촘촘한 접촉의 그물망이 결국 통일의 집을 지을 것이다. 남북관계는 이제 공동체의 제도 안으로 진입했다.
이제 우리 안의 분단도 해소하자. 여전히 우물에 앉아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물에서 나오면 알 것이다. 보수라는 가치를 펼칠 땅이 넓다는 것을. 왜 아직도 냉전반공주의를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평화의 기차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너무 낡은 반공주의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념의 안경만 벗으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협력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초당적 협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우리 안의 화해가 결국 지속가능한 평화의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