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대주주
(출처- 2014년 08월 30일 <당당뉴스> 지성수sydneytax1@hanmail.net )
▲ 매튜 폭스 신부
이번 여름에 한국 가톨릭에 의미 있는 손님 두 분이 오셨다 가셨다. 한 분은 한 반도가 떠들썩거리게 만들었던 교황의 방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가톨릭에서도 대부분은 몰랐던 매튜 폭스라는 쫓겨난 가톨릭 신부였다. 그러나 교황의 행적이 아무리 요란뻑적지근해도 교회사적으로 볼 때 차지할 수 비중은 매튜 폭스와는 비교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튜 폭스는 신학적 기초를 건드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기독교 교리에서 대주주는 어거스틴이다. 그가 행사하는 주식은 ‘원죄-타락-구원’이란 주식이다. 타락/구속 모델은 이분법적이며 가부장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이 주식의 원조는 어거스틴이 아니고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서구 기독교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플라톤을 일컬어 하나님이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릴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한 성인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이 정도하면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의 치마폭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와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달기에 불과하다. ‘고 간파한 바가 있다.
초대교회의 신앙이 형성되고 전파되던 당시에는 희랍의 세계관이 세계를 지배하는 풍토였었다. 희랍 세계관 중에서 기독교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골자는 이원론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의 기독교는 이원론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원론은 이 세계를 거룩함과 세속의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신적이며 영생불멸한 것이고 육체는 인간적인 것으로 변화무쌍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영혼은 마땅히 육체의 구속에서부터 해방되기를 갈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원론에 기초한 신앙은 근대 이후 점점 힘을 잃다가 21 세기인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힘을 못 쓰는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두 조각이 나는 종말이 오더라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고 교회로 달려가지는 않을만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기독교에 다른 대안이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나 역사에는 비주류가 대안을 제시했듯이 기독교에도 대안을 가지고 있는 비주류가 있다. 대표적인 존재가 11 세기 사람인 에카르트였는데 그는 죽은 다음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한국 검찰이 박근혜가 무서워서 선거부정을 못 밝히는 것처럼 교황청이 그가 무서워서 죽은 다음에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심판이 오래 걸려서 판결이 나기 전에 죽은 것이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에카르트를 신학적으로 부활시킨 사람이 매튜 폭스이다.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으로 종교가 담당하고 있던 역할을 심리학이 점점 많이 대신하고 있다.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은 기독교와 심리학을 포함한 과학과 예술이 연결될 수 있는 다리를 놓는다.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학문, 심지어는 뉴에이지까지 갈등 없이 소통할 수가 있다.
심심산골에 살던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하다가 갑돌이가 군대에 갔다.
갑순이가 면회를 가서 위병소에서 면회신청서를 적었다.
면회 신청서의 ‘관계’란에서 갑순이는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요상허네. 군대에서 별 것 다 묻네!’라는 생각이 든 갑순이는 수줍게 위병에게
“아저씨? 이거 뭐라고 써야 되요? ‘라고 물었다.
위병은 무신경하게 “사실대로 써요!”라고 했다.
더욱 곤란해진 갑순이는 한 참을 망설이다가 조그만 글씨로 ‘3’ 이라고 썼습니다.
그걸 본 위병은 눈깔을 부라리며 “지금 나하고 장난 하자는 거예요?”라고 했다.
코너에 몰린 갑순이는 한숨을 내리쉬면서 할 수 없이
‘물레방앗간에서 한 번, 다리 밑에서 한 번, 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한 번“이라고 썼단다.
관계는 이렇게 오묘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관계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폭스가 이해하는 창조의 핵심은 관계에 대한 것이다. 관계가 인간 사이의 관계뿐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로까지 넓혀질 때 우주적 영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안방에 앉아서 똥폼 잡는 영성이 아니라 경험과 실천의 영성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글쓴이 지성수 목사
1991. 2. 7일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오소서 성령이여 -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 7차 총회에서 난리가 벌어졌다. 키가 작은 젊은 동양 여성이 한복 소복차림으로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무대에 나타났을 때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어서 객석의 불이 꺼지고,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시커먼 호주 원주민이 벌거벗은 몸으로(그들은 평소에 주요부분만 가리고 산다) 음울한 소리가 나는 디저리두라는 원주민의 유일한 전통 악기를 불고 원주민들이 땅을 축복하는 춤을 추었고, 드디어 이대 기독교학과 2년차 교수 였던 정현경이 출연하여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정교수는 춤을 멈추고, 향불을 담은 질그릇을 들었고, 그것에서 인류 역사에서 갖가지 비극의 현장에서 희생된 한 맺힌 영혼들의 이름이 적힌 창호지에 불을 붙여 하늘에 재로 날리는 한국식 초혼제를 올렸다. 정현경의 연출로 총회 내에서도 일부 논란이 일었고 나중에 총회의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정현경과 WCC에 대하여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대륙에도 원주민이 있고 그들의 전통이 있다. 즉 서구인들의 눈에는 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으로 보여도 그들 나름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영성이란 뿌리에 관한 것이다. 영성은 피상적이지 않은 삶, 즉 깊이가 있고 뿌리가 있는 삶, 근본적인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뿌리는 한 가닥이 아닌 집단적이다.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뿌리의 집단성을 일컬어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독일의 라인 강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원주민, 폴리네시아나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유대교에서 시작된 기독교에만 영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주의적 영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원론적 신앙과 삶을 극복하려는 현대적 신비주의적 흐름의 하나가 매튜 폭스가 주장하는 창조 영성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창조 영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영성이다. 이것은 단지 21세기 사람들에게는 새롭게 발견한 새로운 전통일 뿐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기독교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동안 낯설었던 ‘창조영성’을 재 복원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 참고
조 현 종교전문기자 창조영성가 매튜폭스 신부 인터뷰
권명수(한신대교수) 자연주의 영성으로서의 매튜 폭스의 창조 영성에 관한 연구
매튜 폭스 신부 대담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2014년 7월 31일 <한겨레> "휴심정")
메튜 혹스 신부
가톨릭회관 대강당에 메튜 폭스의 강연을 들으러온 청중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창조’란 말이 부쩍 떴다. 그러나 그 ‘창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도 안갯속이다. 진정한 창조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해주는 인물이 한국을 찾았다. 미국 오클랜드에 창조영성대학을 설립한 매슈 폭스(74) 신부다.
그는 여성성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원죄론 위주의 교회를 ‘우주적 그리스도’의 창조적 교회로 변화시켜야 함을 역설하는 개혁가다. 그가 말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란 우주 모든 생명 자체가 바로 하느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신부로서 34년 동안 지냈으나 그런 개혁적 발언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돼 1995년 축출됐다. 이후 성공회가 그를 영입했기에 그는 성공회 신부다.
그러나 지난 19~24일 그의 제자 고혜경 박사의 소개로 그를 초청한 것은 가톨릭 쪽이었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 에코포럼의 세 시간 강연엔 가톨릭 사제·수녀 100여명을 비롯한 400여명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차 ‘새로운 교회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그는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 <원복> 등을 통해 책으로만 소개됐을 뿐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성가를 지난 23일 한 호텔에서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창조영성가답게 ‘직관’을 중시한다. 그는 “하느님이 매 순간 천사, 즉 직관을 쏟아 붓고 있는데 우리가 문을 닫아걸고 있다”며 “직관에 도움을 청하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직관이 가부장적 질서나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때 꽃필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선승다운 면모다. 내공을 갖추고서도 허례 같은 걸 요구하지 않으면 진정한 문답이 가능해진다.
첫 질문은 그의 전문 특허인 창조성에 대해서다. ‘인간들의 창조성이라는 게 탐욕을 이루기 위해 자연과 생명, 즉 ‘우주적 그리스도’를 해치는 데 더 많이 쓰이지 않느냐’는 거였다.
“맞다.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핵무기를 만들 때도 창조성이 발휘된다. 인간이 그렇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인간의 악이 모든 동물들의 악보다 더 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를 보라. 그런 파괴적 힘은 다분히 가부장적이어서 소수의 이익만을 섬기는 것이다. 신의 모성성으로부터 나온 창조는 정의와 자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소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명까지 위하는 창조성이어야 한다.”
폭스 신부는 모성성과 창조성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세상에 더욱 확산되어가는 ‘근본주의 경향’을 꼽는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인 근본주의에 대해 그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위에 깊은 참호를 파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스컴과 인터넷으로 세상이 동시에 소통되고 있는데 왜 근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질서와 통제만을 선호하고, 혼돈을 싫어한다. 질서와 통제가 극대화한 사회가 파시즘이다. 옛날엔 혼돈을 여신과 동일시했다. 혼돈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아이가 태어날 때 보라. 피범벅이 되어 혼돈 그 자체다. 생명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혼돈을 싫어해 여성성의 발현을 이단이라며 마녀사냥을 했다. 동성애자나 성소수자도 핍박한다.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다. 본래 자연 그 자체는 다양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는 것도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 때문이다. 그는 “전임 두 교황(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도 16세)은 이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적으로 열려 있으며, 다양한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는 근본주의적 종교재판의 희생양이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선 부정과 군사기지 건설, 환경 파괴 등에 반대해 정의를 외친 신부·수도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종북’으로 비판을 받는데,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느냐”고.
“예언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소수 권력자를 만족시키는 현 체제는 당연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물 건너간 것이고 핍박을 자처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랬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어서까지 3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에크하르트도 그토록 비난을 받았고, 힐데가르트 수녀도 700년이나 유폐됐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반대한 시위에 나섰을 때 흑인 목사들조차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비난했다. ‘설사 상사가 잘못된 일에 동조하라고 하더라도 양심에 따라야 한다’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현시대의 응원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 그런 위대한 선조들과 순교자들, 예언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누구도 수동적으로 있어선 안 된다”는 행동파다. 억압받고 창조성을 억누르면 우울해지고 비관주의만 팽배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와 통제의 우상인 가부장적 하느님이 아니라 모성적인 창조적, 우주적 하느님을 발현해 가라고 독려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직관적 창조주의자다운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는다.
“가능성, 즉 대안이나 출구가 없을 때 절망하게 된다. 예언자들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논쟁과 비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위기를 타개할 대안을 만들어내고 조직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논쟁보다 기쁨을 좋아한다. 좋아한 것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창조적이니 못할 게 없지 않은가.”